나는 지난여름 시작한 45일간의 유럽 여행 마지막 코스를 프랑스의 아르덴 지역 도시 스당으로 잡았다. 영어명으로는 세단(Sedan)인데 프랑스 사람들에겐 악몽(惡夢)의 이름이다. 1870년 여기서 나폴레옹 3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10만 명이 프로이센군에 항복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혔다. 1940년 5월 15일, 프랑스 수상 폴 레노는 영국 수상 처칠과 통화하면서 “스당이 돌파되었습니다. 우리는 졌습니다”라면서 흐느꼈다. 프랑스군은 그 40일 뒤 항복한다.
프랑스가 이 두 번의 치욕, 특히 국가의 명예심과 영혼마저 무너진 두 번째 패배에서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나?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프랑스 육군이 6주 만에 항복한 것은 군사적 패배일 뿐 아니라 정신적 붕괴였다. 프랑스 국민은 좌우(左右)로 갈려 싸우느라고 나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잊었고 프랑스군은 패배를 수치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 도덕적으로도 철저히 망가진 프랑스를 거의 혼자서 다시 일으켜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샤를 드골이다.
드골의 분노 프랑스군의 이론가로 유명했고 일찍부터 전차와 전투기를 결합시킨 전격전(電擊戰)을 예상하고 기갑군단의 창설을 주창했던 드골이었다. 그의 전쟁교리를 프랑스군은 무시했지만 히틀러는 참고했고, 독립적인 전차군단을 육성했으며 아르덴 돌파전에 투입, 성공했다. 드골은 제4기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스당이 돌파된 직후 반격작전에 나섰다. 부분적으로 성공하고 독일군 포로 수백 명을 붙잡기도 했으나 무너진 둑을 메울 순 없었다. 5월 16일의 상황을 그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피란민 속에는 패잔병들도 보였다. 그들은 독일 기갑부대로부터 궤멸적 타격을 받았다. 달아나던 병사들은 독일군에게 붙잡혔다. 독일 기계화부대는 이들에게 무기를 버리라고 한 다음 서진(西進)하는 독일군의 길을 막지 말고 남쪽으로 가라고 놓아주었다. “우리는 너희를 포로로 잡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이런 모욕적인 광경을 목도하고 나는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아, 이런 바보짓! 전쟁은 최악의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 세계는 넓다.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적을 무찌르는 그날까지. 그리하여 이 국가적 수치가 깨끗하게 지워질 때까지. 그 이후 내가 한 모든 행동은 그날 결심한 것이었다.〉
드골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세 번 부상당했는데, 프랑스 동부전선 베르당 전투에 중대장(대위)으로 참전했다가 1916년 3월 독일군의 포로가 된 적이 있다. 32개월 동안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다섯 번 탈출을 시도하였지만 붙잡혔다. 독일과 프랑스군은 포로가 된 장교들을 예우하여 그는 책을 쓰기도 했다.
敗戰의 도시 스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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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당 뮤즈강. 1940년 독일 기갑군단은 이 강을 건너 프랑스를 무너뜨렸다. |
브뤼셀에서 남쪽으로 달려 룩셈부르크를 지나 프랑스의 스당으로 가는 길은 아르덴 숲을 지난다. 아르덴 숲 지대는 면적이 경상남도 정도이고 벨기에-룩셈부르크-프랑스에 걸쳐 있으며 아름드리나무로 울창하다. 언덕과 낮은 야산, 그리고 평지의 연속이다. 프랑스군이, 독일 전차군단은 이 숲 지대를 통과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 방어에 소홀했다가 당한 것이 이해도 되었다. 프랑스는 아르덴 지역을 지나는 뮤즈강이 자연적 방어망이라 생각했다.
스당은 군사도시여서인지, 두 번의 결정적 패전(敗戰)의 현장이어서인지 무거운 분위기였다.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중세(中世)의 성곽엔 군사박물관이 있었고 보불(普佛)전쟁 기록이 많았다. 프랑스 군인들이 단체로 입장, 패전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었다. 스당 시내를 가르는 뮤즈강은 너비가 100m 내외였다. 독일군 전차군단은 1800대의 전차와 3만 대가 넘는 차량으로 50여 시간에 걸쳐 아르덴 숲을 통과한 뒤 이 뮤즈강을 건넌다.
대안(對岸)에서 진지를 구축했던 프랑스군은 독일 전폭기의 맹폭(猛爆)을 견디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프랑스 공군이 만약 아르덴 숲속에서 교통체증을 겪고 있는 독일 전차군단을 발견, 폭격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거기서 끝났을지 모른다. 실제로 한 프랑스 정찰기는 숲속에 엉켜 있는 어마어마한 기갑부대를 발견, 상부에 보고하였으나 “잘못 봤겠지. 거기에 독일군이 있을 리 없다”며 묵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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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덴의 숲. 프랑스군은 독일 기갑부대가 숲을 통과하기 어렵다고 오판했다. |
스당을 돌파한 구데리안 장군 휘하의 독일 전차군단은 케르크 쪽 해안을 향하여 돌진, 벨기에 북쪽으로 진출했던 프랑스·영국 연합군의 주력을 배후에서 차단, 포위, 섬멸했다. 독일 군인들은 필로폰을 먹고 불철주야로 야수(野獸)처럼 싸웠다.
나는 스당의 성곽 안에 있는 호텔을 예약하려 했으나 만원(滿員)이라 가까운 샤를빌메지에르 근방 작은 호텔에서 잤다. 샤를빌메지에르 광장은 크고 활기가 넘쳤다. 이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 격전지로서보다는 상징주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출생지로 더 유명하다.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타이타닉〉으로 출세하기 전에 랭보를 연기한 영화 〈토탈 이클립스〉는 흥행에는 대실패했지만 시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정확하게 그렸다는 평을 받는다. 35세에 죽은 그가 19세 때까지 쓴 시는 20세기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랭보는 시를 절필(絶筆)한 이후 아프리카 등을 유랑하다가 죽었다.
대문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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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당의 요새. |
프랑스 문학의 힘은 프랑스어로 쓴 고흐의 편지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나는 드골의 지도력이 여기서 나왔다고 본다. 영국 저술가 폴 존슨도 《모던 타임스》에서 드골을 정치가나 군인으로서가 아니라 지성인으로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썼다.
드골은 《전쟁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2014년에 알려졌다). 나는 이 회고록은 인간적 깊이와 문장력에서 처칠의 회고록을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드골은 두 권의 회고록을 직접 썼다. 아르덴 돌파전으로 정치적·군사적·정신적으로 파탄 난 프랑스와 군대와 국민들을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의 고뇌가 스며 있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되찾는 것이 조국 재건(再建)의 핵심임을 파악하고, 거의 맨손으로, 경멸을 받아 가면서 처칠·스탈린·루스벨트 같은 세기적 거인(巨人)들을 상대로 밀고 당기는 처절한 모습은 비슷한 처지의 이승만(李承晩)과 자꾸 겹쳤다(이승만 또한 대문장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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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의 《전쟁 회고록》.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
드골은 14권의 책을 썼고 연설문은 다섯 권의 책으로 남아 있다. 원고지에다가 만년필로 글을 썼다. 천천히 정성을 다해 썼는데 특히 구두점(句讀點) 찍기에 신경을 썼다. 구두점 찍기는 문장이 숨을 쉬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누가 나에게 영향을 끼쳤는가 묻지 마라. 사자는 그가 소화한 양(羊)으로 구성되어 있듯이, 나는 평생 독서를 하였다”고 했는데 그의 간결한 문장은 어마어마한 깊이와 폭을 가진 독서와 사색의 산물이었다. 제5공화국 때 한 장관이 물었다.
“장군께서 가장 숭배하는 직업은 무엇인가요.”
“첫째, 위대한 문필가, 다음은 위대한 사상가, 셋째는 위대한 정치인, 넷째는 위대한 장군.”
드골은 1958년 권좌에 복귀한 후 소설가 앙드레 말로를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 국무회의를 할 때는 수상의 맞은편 자리에 앉히고 회의를 주도하도록 배려했다.
70대의 나이에 두 번 나라를 살린 점에서 드골과 이승만은 비슷하고 짓밟힌 민족혼(民族魂)을 되찾기 위하여 우방국 지도자들을 상대로 악역(惡役)을 마다하지 않고 싸워야 했던 점에서도 유사하며, 이런 정신력의 원천이 무서운 자기 확신과 이를 뒷받침한 문장력에서 나왔다는 점도 서로 통한다. 차이점도 있다. 드골은 자신의 정치 노선을 이어갈 세력을 만들어 그 뒤의 프랑스를 이끌도록 했지만 이승만은 이념정당 건설에 실패, 사후(死後) 평가가 박하다는 점이다.
역사적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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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은 1940년 6월 18일 BBC 방송을 통해 프랑스인들에게 對獨항전을 호소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드골은 기갑사단장에서 국방차관으로 옮겼다가 프랑스 정부가 항복을 결정하자 불복(不服), 영국으로 도피,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그가 처칠을 설득하여 맨 처음 한 일은 BBC를 통한 방송이었다. 1940년 6월 18일의 이 방송 연설은 역사적 명문(名文)이다. 이날은 하필 워털루 패전 125주년이었다.
“프랑스인들에게 보내는 드골 장군의 호소:
오랫동안 프랑스군의 수뇌부에서 일했던 지도자들이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부는 적대(敵對) 행위를 중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적(敵)과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기계화된 적의 군사력에 의하여 육상과 공중에서 압도되었고, 지금도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우리의 병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의 탱크와 비행기와 전술이 우리 군대를 퇴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 지도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독일의 탱크, 비행기, 전술이 만들어낸 기습의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일까요? 우리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요?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이고 재기불능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니오!
내가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대의(大義)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패배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어느 날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기억하십시오. 프랑스는 홀로 선 게 아닙니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뒤에는 광활한 제국이 있고, 우리는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싸움을 계속하는 대영(大英)제국과, 같은 대의로 손잡을 것입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미국의 엄청난 공업력을 무제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운(不運)한 우리나라에 한정된 전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의 결과는 프랑스 전역(戰役)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전쟁입니다. 실수가 많았고, 늑장도 부렸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 세계가 장차 우리의 적을 파멸시킬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덮친 기계화부대의 거대한 중량(重量)에 의하여 붕괴되었지만, 더 강력한 기계화부대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미래를 내다봅니다. 세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나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영국 영토에 있거나 있게 될 모든 프랑스 장교와 남자들, 무기를 가졌거나 갖지 않았거나를 불문하고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영국 영토에 와 있거나 장차 오게 될 군수공장의 기술자와 숙련공들에게도 호소합니다. 나와 연락합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 저항운동의 불꽃은 죽지 않아야 하며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설에서 예언한 경로대로 히틀러는 진다. 드골의 역사적 예지력(豫知力)이 놀랍다.
몽클라르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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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몽클라르 장군 |
드골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군인들은 매우 적었다. 나치 독일이 허용한 남불(南佛) 비시 정부의 페탱 원수는 한때 총애했던 부하 드골의 저항운동을 반역으로 규정, 궐석(闕席)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도록 했다(프랑스 해방 뒤 드골은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된 페탱을 감형했다). 6월 29일 드골은 노르웨이 전선에서 영국으로 철수한 프랑스 산악사단의 주둔지를 방문했다. 사단장은 항복한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면서도 드골이 부대원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사단에 배속되었던 외인(外人)부대 여단의 지휘관은 라울 마그랭 베르느레 대령이었다.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드골에게 합류하겠다고 했다. 드골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을까? 이 대령은 별명이 있는데 몽클라르이다.
한국전에 프랑스 대대장으로 참전한 바로 그 사람임을 드골의 회고록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특종(特種)을 한 것처럼 반가웠다. 한국전이 터지자 프랑스는 지원병 700명을 보내는데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들로 구성된 강팀이었다. 퇴역을 앞둔 현역 중장 몽클라르는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 프랑스 대대를 이끌었다. 미(美) 2사단에 배속되어 1951년 초 양구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구조될 때까지 버티어냈다. 당시 58세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 여러 번 부상당하였다.
그는 1941년 자유프랑스군으로서 프랑스의 비시 정부 소속 외인부대와 싸울 처지가 되자 옛 동료들을 상대로는 총을 쏠 수 없다고 지휘를 거부하기도 했다. 드골의 회고록엔 몽클라르의 용전(勇戰)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온다. 그는 1951년 한국전선에서 귀환, 퇴역했다가 1962년 파리의 유명한 군사박물관 겸 군인묘지인 앵발리드 관장으로 취임, 2년 뒤 사망, 거기에 안장되었다.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된 한국전 프랑스 대대는 연 3000명이 참전, 30%가 죽거나 부상했다. 그의 아들 증언에 따르면 몽클라르 장군 부인은 갓 태어난 아들을 봐서라도 한국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몽클라르는 한국에서 생후 11개월 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너와 같은 또래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물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여기 왔단다.”
히틀러와 독일의 情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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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은 히틀러를 ‘독일인들이 갈망하던 새로운 애인’에 비유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샤를 드골의 《전쟁 회고록》에 나오는, 그가 직접 상대했던 처칠·스탈린·루스벨트·트루먼 등에 대한 인간적 묘사는 절묘한데, 특히 히틀러의 최후에 대한 평가는 몇 권의 책을 응축한 것 같은 밀도이다. 역사와 문학과 정치가 만난 경우이다. 번역하여 소개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명문(名文)이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자신의 악업(惡業)을 종식시킨 것은 반역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그 악업을 구현한 것도 그였고 끝장낸 것도 그 자신이었다. 이 프로메테우스는 묶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심연(深淵)으로 던졌다. 무(無)에서 출발한 이 사나이는 독일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새로운 애인(愛人)을 갈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내던졌다. 몰락한 황제와 패배한 장군들과 멍청한 정치인들에게 싫증이 난 그녀는 미지(未知)의 이 거리의 사나이에게 몸을 맡겼다. 이 사나이는 모험적이고, 지배적이었으며, 그의 히스테릭한 목소리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본능을 자극했다. 더구나, 베르사유에서 당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용감한 커플은 그들 앞에 기나긴 미래가 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유럽은, 여기저기서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유혹과 공포로 시야(視野)가 흐려졌고, 민주주의에 절망했으며, 한물간 이들의 훼방 속에서도 독일의 역동성에 수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것을 이루려 했다. 그는 파시즘과 인종주의를 결합한 교리를 만들었다. 전체주의 시스템은 그가 견제나 제약 없이 행동하도록 허용했다. 기술의 발전은 그의 손에 놀랍고 충격적인 카드를 쥐여주었다. 그 시스템은 폭압으로, 폭압은 범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괴물에겐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법. 더구나 히틀러는 강력할 뿐 아니라 간교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이란 애인을 어떻게 유혹하고 어떻게 애무하면 되는지를 잘 알았고, 완벽하게 낚인 독일인들은 그들의 주인을 열광적으로 따랐다. 최후의 최후까지 독일인들은 그를 노예처럼 모셨고, 어떤 나라 사람들이 그 어떤 지도자에게도 제공한 적이 없는 봉사를 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적 장애물에 직면하게 된다. 그의 거대한 계획은 인간의 밑창에서 나오는 저열한 힘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사람은 진흙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이 그 어떤 용기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무 나간 오만이었다. 독일 제국은 무엇보다 먼저 민주국가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베르사유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고 나서는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를 합병하는데, 파리의 비겁한 굴종과 모스크바의 공모(共謀)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그다음엔 중립을 지키는 러시아 앞에서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겁을 먹은 프랑스 앞에서 러시아를 타도하려 했다. 이 두 목표가 달성된다면 영국은 미국의 사치스러운 중립 때문에 (독일의) 멍에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럽은 좋든 싫든 새로운 질서의 물미 아래로 완전히 통합될 것이며 일본은 동맹국의 역할을 맡아 미국은 포위, 고립되고 굴복하고 말 것이다.
‘히틀러의 시도는 초인적·비인간적’ 처음엔 계획한 대로 흘러갔다. 무서운 무기와 무자비한 법으로 무장한 나치 독일은 연전연승(連戰連勝)의 가도(街道)를 달렸다. 제네바, 뮌헨, 독소(獨蘇)불가침 조약 등은 히틀러가 이웃 나라들을 경멸하는 근거를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이 나라들 가운데서 용기와 명예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파리와 런던은 폴란드의 살해를 묵인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히틀러도 맨정신이었으므로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났다고 알아챘을 것이다. 그의 기갑군단은 국가도 지휘부도 상실한 프랑스를 쓸고 지나갔지만 영국은 해협 건너에서 항복을 거부하였고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항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투쟁이 바다에서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비밀 저항전선으로 번져갔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 병력은 다른 전장(戰場)에 분산되어 소련을 굴복시킬 정도로 충분하게 투입될 수 없었다. 그 뒤 미국은 일본의 공격으로 전쟁에 뛰어들었고, 군사력을 확실하게 전개하였다. 독일과 히틀러의 엄청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운명은 이로써 결정되었다.
히틀러의 시도는 초인적(超人的)이었고 비인간적이었다. 그 어떤 주저도 없이 이런 자세를 유지하였다.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맞이한 최후의 고통스러운 시간까지 그는 전성기 때처럼 아무런 반대도 없이 강고하고 무자비하게 초인적, 비인간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자신의 투쟁이 가져온 그 기억들의 끔찍한 위대성을 위하여 그는 주저하지도, 타협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지구를 들어 올리려 하는 타이탄은 굽힐 수도 접을 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정복당하고 파멸당함으로써 그는 다시 인간성을 되찾았을 것이고, 모든 것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아무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드골-아데나워 역사적 회담 드골은 패전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전승국(戰勝國)으로 만들었고,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5대 상임 이사국의 일원이 되었다. 프랑스가 1958년 알제리 독립 문제로 내전(內戰) 일보 직전까지 가자 싸움만 하던 정치권이 만장일치로 그를 불러내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改憲), 제5공화국을 열었다. 10년의 재임 기간 그는 독일과 화해, 유럽 통합의 기초를 놓았고, 핵무장을 했으며 자유 진영의 한 중심이면서도 미국과 소련에 대해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유지하였고 원자력 산업 등 과학과 공업을 진흥시켜 GDP에서 처음으로 영국을 추월했다. 이런 드골의 공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게 평가되는데, 특히 서독의 아데나워와 손잡고 추진한 독불(獨佛) 화해는 EU(유럽연합) 탄생으로 이어져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나를 편하게 이 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58년 9월 14일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은 82세의 노령(老齡)이었다. 서독을 11년간 통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권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 영내(領內)로 들어서자 불안해졌다. 그 몇 달 전 권좌로 돌아온 샤를 드골 수상(제5공화국 개헌 뒤 대통령이 된다)의 초대로 콜롱베에 있는 드골의 자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길가엔 독일군의 공격으로 죽은 프랑스 군인 묘지가 많았다. 그는 드골이 권위주의적이고 공격적이며 반독(反獨) 성향이 강하다는 보고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회담을 수락한 것이 실수가 아닐까 생각도 했을 것이다.
콜롱베 자택에서 그를 기다리던 68세의 드골도 불안했다. 도착 시각이 지나도 아데나워가 나타나질 않는 것이었다. 늦어지면 늙은 부인이 마련해놓은 점심 요리가 식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아데나워가 탄 차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느라고 늦었다. 드골은 아데나워가 천천히 승용차에서 내리자 다가가서 두 손으로 악수를 하고 독일어로 인사를 했다. 독일 손님을 집안으로 인도하느라 서두는 바람에 아데나워는 넘어질 뻔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천주교 신도인 두 사람은 출생지(콜롱베와 쾰른)도 라인강 주변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共有)하는 관계여서 그날 대화는 영혼과 영혼의 교감으로 이어졌고, 그 뒤의 독불 화해는 물론이고 유럽 통합의 길을 내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두 巨人, 영혼을 열다! 정계에 복귀한 드골은 당시 서독 수상 아데나워의 위대성을 간파했다. 드골은 정치와 인간을 늘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이다. 그는 회고록(《희망의 회고록: 재생과 노고》)에서 아데나워를 이렇게 분석했다.
〈가장 유능한 지도자이자, 독일을 프랑스와 함께 가는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콘라트 아데나워가 수상직에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이 라인란트인(人)은 골족과 튜턴족의 성격을 상호보완적으로 체득(體得)하였다. 그런 성격은 라인강 변의 로마 문명에 거름 역할을 하였으며 프랑크 제국 샤를마뉴의 영광으로 이어졌고,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존립 근거가 되었으며, 프랑스 왕과 선제후(選帝侯)의 관계를 뒷받침했고, 독일을 혁명의 열기로 타오르게 했으며, 괴테·하이네·스탈 부인, 그리고 빅토르 위고를 감흥(感興)시켰고 두 민족이 격하게 싸우면서도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면서 길을 찾도록 했다. 이 애국자는 히틀러의 광적인 야망과 독일 대중과 엘리트들의 맹종이 만든 독일과 이웃 나라들 사이 증오와 불신의 장벽을, 프랑스만이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아데나워도 드골을 높게 평가했고 돌아온 드골이 장기 집권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드골을 만나고 싶어 했다. 드골은 그를 콜롱베의 자택으로 초대했는데, 드골은 ‘늙은 프랑스인과 더 늙은 독일인’이 두 민족의 대표로서 만나는 데는 화려한 궁전보다는 소박한 분위기가 더 어울린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만나자마자 아데나워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귀하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 찾아왔습니다. 귀하의 인격과 프랑스를 위하여 이룩한 업적, 그리고 다시 권좌에 돌아오게 된 배경 등을 생각할 때 그런 수단을 갖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우리 두 국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완전한 우호 관계로 재정립할 수 있는 입장에 이르렀습니다. 두 나라가 옳은 방향으로 접어들긴 했지만 그것은 독일의 패배와 프랑스의 기진맥진에 기인한 것으로 역사의 시간대로 본다면 쉽게 변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문제는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에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는 진정한 장기적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서로 갈등하다가 서로 적대하게 될 것이며 이는 상호 몰락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귀하의 목적이 두 나라의 진정한 화해라면 나도 함께 노력할 결심이고, 이 분야에서 확실한 자산을 갖고 있습니다. 수상직을 11년간 지켜왔지만 나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그 직을 유지할 것이며, 내가 쌓아온 업적에 대한 평가와 히틀러로부터 나와 가족이 받은 핍박의 기록은 나로 하여금 원하는 방향으로 독일 정책을 끌고 가게 합니다. 귀하는 어떤 방향으로 프랑스 정책을 밀고 나가려 합니까?”
화해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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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7월 18일 쾰른공항에서 드골을 영접하는 아데나워. 두 사람은 역사적·문명적 공감대를 공유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드골이 아데나워를 라인란트인이라고 부르고 ‘아우스트라시아’(라인강 변의 프랑스 동부,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서부 지역 문화권)를 언급한 것은 그의 깊은 역사의식을 보여준다. 히틀러란 괴물을 만든 독일인과 아데나워를 구별하는 시각이다. 라인강을 둘러싼 로마문명, 게르만족 중에서도 가장 먼저 패권을 장악, 오늘의 프랑스 및 독일을 통치했던 프랑크족, 그 전성기를 열어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을 거의 통일하였던 샤를마뉴(大王이란 뜻이 있다)의 맥을 이을 수 있는, 즉 독불 화해를 넘어서 유럽 통합을 지향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로 본 것이다. 아데나워는 라인강 문화권인 쾰른에서 태어나 쾰른 시장을 지냈고 히틀러 시절엔 정계에서 밀려나 투옥, 연금(軟禁) 등 고초를 겪었으며 이 경력이 그를 전후(戰後) 독일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드골은 그와 아데나워가 역사적·문명적 공감대를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드골은 자신의 비전을 장엄하게 요약하였다.
“독일의 야욕(野慾)에 따른 결과로 프랑스는 세 번, 1870년, 1914년, 1939년에 끔찍한 고통을 겪었지만 프랑스는 지금 패배하고 해체되고 국제적 위상이 초라하게 된 독일을 마주하게 되어 두 나라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모든 것보다 우선하는 유럽 통합의 중요성과 이것이 성공하려면 파리와 본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감안할 때 두 나라 국민들이 화해하고 그들의 노력과 능력을 통합하여 역사의 진로를 바꿀 때라고 생각합니다.”
두 늙은 거인(巨人)은 구체적 논의에 들어간다. 아데나워는 세 가지 어려운 부탁을 프랑스에 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첫째는 독일이 다른 나라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아 국제적 위상을 회복하도록 프랑스가 도와주었으면 한다. 둘째, 소련 진영의 위협, 특히 베를린에 대한 위협에 노출된 독일을 지원할 것. 셋째, 독일 재통일(再統一)의 권리를 인정해줄 것.
드골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자신의 통합, 안전, 혹은 서열(序列)과 관련하여 프랑스는 독일의 도움을 받을 일은 없지만 숙적(宿敵)의 재활을 기꺼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돕겠습니다. 두 국민들의 화해를 위하여, 세력 균형의 유지를 위하여, 그리고 유럽의 단합과 평화를 위하여. 이런 도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독일 측에서도 충족시켜줘야 할 조건들이 있습니다. 현존하는 국경선을 존중할 것, 동구권과 친선의 태도를 유지할 것, 핵무장을 완전하게 포기할 것, 재통일을 서두르지 않을 것.”
“프랑스는 위대성을 추구해야 존립 가능” 아데나워는 드골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였다. 이 대목에서 드골은 흥미로운 관찰을 한다. 아데나워가 독일의 재통일을 갈망하긴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프로이센적이고, 개신교적이며, 사회주의적인 동독 지역을 즉각 흡수하는 데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는 감상을 회고록에 적었다.
아데나워는 스탈린이, 통일된 독일의 중립화를 조건으로 통일을 허용하겠다고 제안하였을 때 이를 거부한 적이 있다. 그는 중립국으로서의 재통일보다는 확실하게 자유 진영, 즉 서유럽 편에 서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를 한반도에 적용한다면 한국은 연방제식 중립화 통일보다는 분단을 지속하더라도 한·미·일 동맹을 축으로 하는 자유 진영 편에 서 있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드골과 아데나워는 유럽의 장래에 대하여 긴 대화를 이어갔다. 아데나워는 서유럽의 시스템을 도입하고 미국의 도움을 받아 다시는 독일인이 과거처럼 소외감을 느껴 힘의 숭배로 빠져들고 히틀러의 품 안에 안겨버렸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했다. 드골은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영국이 가입 신청을 해도 이를 거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영국의 도움으로 독일에 항전했지만 영국의 역사적 배경과 행태로 보아 유럽 통합을 위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근년의 영국 EU 탈퇴는 드골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말해준다.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독일이 핵무장을 해선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프랑스는 핵무장을 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들의 조국이 유럽의 마스토돈(거대 동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위대성에 대한 자각과 책임의식이 오랜 분열적 습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단합을 유지해왔습니다. 이런 국제적 사명을 포기하면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에 대한 관심을 잃고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프랑스의 쇠락은 독일을 포함한 세계의 모든 나라에 손해가 될 것입니다.”
아데나워는 이렇게 응수했다.
“동의합니다. 나는 프랑스가 세계에서 응당 차지해야 할 위상을 다시 찾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독일 국민들도 프랑스 사람들과는 다른 천재성을 가졌지만 똑같은 의미의 존엄성을 필요로 합니다. 귀하가 독일이 그런 존엄을 회복하는 것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음과 영혼을 열어놓고 한 대화였다. 아데나워는 회고록에 드골에 대한 인상을 남겼다. 언론을 통해 들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고 했다. 젊은 사람의 기백을 가지고 있고 세계정세에 정통했으며 그의 애국심은 공격적이지 않았고 소박성과 자연스러운 태도에 놀랐다는 것이다. 이날의 공감대에 기초하여 두 나라는 화해 협력의 길을 달려갔고, 9세기 이후 1100년 동안 샤를마뉴, 카를 5세, 나폴레옹, 히틀러가 무력(武力)으로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유럽 통합이 성공했던 것이다. 드골은 회고록에서 1958~1962년 사이 두 사람이 40회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15회 만났고, 100시간 이상 흉금(胸襟)을 털어놓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고 자랑했다.
케네디에게 한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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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31일 케네디 부부와 만난 드골. 드골은 케네디에게 월남전 참전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
1969년, 프랑스 대통령직에서 스스로 물러난 드골이 1970년에 죽고 나서 나온 회고록은 《희망의 회고: 재생과 노력》이다. 이 책에는 1961년 5월 31일 프랑스를 방문한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드골은,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한 지 넉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활기에 넘쳤고, 품격 있는 부인과 함께 정말로 매력적인 커플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월남에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며, 이는 인도차이나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는 목적이라고 설명하자 일장훈시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었다.
“귀하는 이 지역에 개입하면 끝도 없는 수렁에 빠질 것임을 곧 알게 될 겁니다. 민족 전체가 궐기하면 어떤 외세도, 아무리 강력해도, 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지역의 지도층이 이해관계에 따라 미국에 복종한다고 해도 인민들은 따르지 않을 것이고, 진정으로 미국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귀하가 (반공)이념을 내세워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민중의 눈에는 그 이념이란 것도 미국의 권력욕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칠 겁니다. 그래서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일에 휘말리면 휘말릴수록 공산주의자들은 더욱더 민족 독립의 챔피언으로 보일 것이며, 그들은 절망한 이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게 될 겁니다.
우리 프랑스가 일찍이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의 자리를 대체하려고 우리가 떠난 데서 시작하여 우리가 끝낸 전쟁을 재개(再開)하려 하는군요. 미국이 얼마나 많은 인력과 돈을 부어 넣든 바닥을 모르는 군사적·정치적 수렁으로 차츰차츰 빠져들게 될 것임을 예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불행한 아시아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이들 나라를 운영하는 일을 떠맡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전체주의로 밀어 넣는 요인인 비참함과 모욕감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서방 세계의 이름으로 귀하에게 하는 것입니다.”
민족 전체가 궐기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말은 그 자신이 망한 프랑스를 되살릴 때 경험했기에 더욱 확신에 차 보인다. 케네디는 드골의 말을 경청했지만 그 뒤의 사태 전개는 불행히도 드골의 예언대로 흘러갔다. 미군 5만 명의 전사(戰死)를 견디지 못한 미군은 철수하고 월남은 공산화되었다. 드골의 적중한 예언은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그의 지성(知性)과 지혜를 보여준다.
1940년 5월 아르덴 전투 때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던 월남군 기관총 사수(射手)들은 뮤즈강을 건너는 독일군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티었는데 프랑스군이 오히려 먼저 도망을 쳐버렸다. 1954년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 월남을 포기하였다. 월남은 13세기 말 몽골 쿠빌라이 군대의 침공을 저지한 기록도 남겼다. 월남 민족의 저력을 잘 아는 드골의 충고였다. 미국의 월남 개입을 주도한 관리들은 명문대학교 출신의 최고 엘리트(The Best and the brightest)였다. 그들이 놓친 것은 월남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에 대한 드골 수준의 통찰력이었다. 드골의 탁월한 리더십의 근저엔 엄청난 독서와 경험으로 축적된 역사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문적 교양이, 큰 인물을 만든다.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20세 때 죽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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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골은 조국을 패전과 내전위기로부터 두 번 구했다. |
1958년 드골은 수상으로 추대되자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改憲), 만성적인 정치 불안에 종지부를 찍었다(제5공화국 출범). 자신을 다시 권좌로 밀어 올린 알제리 주둔 군부의 뜻과는 달리 드골은 알제리 독립을 승인, 극우(極右) 비밀군사조직으로부터 여러 차례 암살 기도(企圖)에 직면하였다(그가 탄 차가 매복 공격을 당하여 집중사격을 받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살아났다). 알제리 주둔군의 쿠데타 시도도 진압하였다.
드골 치하(治下)에서 프랑스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고 과학기술(항공·원전 등)을 발전시켰으며 핵무장을 하고 중국과 수교(修交)하는 등 미국에 예속되지 않는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었다. NATO의 작전통제권에 프랑스군이 들어가는 데 반대한 드골은 1966년 NATO에서 탈퇴, 퐁텐블로에 있던 NATO 사령부도 브뤼셀로 밀어냈다(2009년에 복귀).
그의 사후(死後)에도 드골 노선은 프랑스 정치의 주류(主流)로 이어지고 있다. 그는 두 차례 16년간 프랑스를 이끌었다. 처음엔 망해버린 나라를, 두 번째는 내전 직전의 나라를 맡아 위기 탈출에 성공하였다. 오늘의 프랑스, 오늘의 유럽은 드골 없이는 이뤄질 수 없었다. 드골의 문학적 지성에서 나온 세상의 조화(造化)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문학은 인간과 나라의 품격이다.
드골의 전기(傳記) 《최후의 위대한 프랑스인》을 쓴 영국인 찰스 윌리엄스는 드골의 신념은 프랑스의 국익을 수호하는 것 하나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서는 초월적이고 초연한 리더십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드골을 존경하는 사람들도 그로부터 인정(人情)을 느낄 순 없었다. 드골이 진정으로 사랑한 이는 다운증후군을 앓다가 스무 살에 죽은 딸 한 사람뿐이었다고 했다. 1948년 딸이 죽자 드골은 부인에게 “이제야 우리 아이도 다른 사람과 같아졌다”고 했다고 한다.
묘비명 그는 마지막 1년을 회고록 집필에 쏟았다. 두 번의 은퇴 기간에 쓴 두 권의 회고록이 드골을 역사 속에 깊고 굵게 새겼다. 그는 문필가로 살고 죽은 사람이다. 미리 써놓은 유언에서 가족장으로 할 것과 장례식에 대통령이나 장관들이 참례(參禮)하는 것을 금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해방군으로 함께 싸웠던 전우(戰友)들의 조문만 허용하였다. 프랑스 정부는 이 유언을 존중하여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별도의 영결식을 가졌다. 퐁피두 대통령은 드골의 서거를 발표하면서 “프랑스는 과부가 되었다”고 했다.
드골은 자신의 묘비(墓碑)에 이렇게만 새기게 했다.
〈Charles de Gaulle, 1890~1970〉
그는 은퇴 후에 대통령 연금(年金)을 받지 않았다. 다만 대령 계급에 해당하는 연금만 받았다. 유족은 그가 죽은 뒤 유지 능력이 없어 저택을 팔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