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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趙甲濟의 기자교실
KAL에 칼을 댄다! 趙甲濟  |  2022-08-18

 

KAL의 안전을 따질 권리

  

  화살 맞고 빈사 상태에 빠진 가련한 새-대한항공(KAL). 지난 1983년은 온 국민들이 「우리의 날개」 KAL과 함께 앓고 분노했던 한 해였다. 힘겹게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떨어지는 한 마리 새를 포근히 감싸고 덮어 주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낌이 없었다. 우리 나라의 어느 기업이 KAL만큼 국민과 정부, 그리고 언론의 귀여움을 받았을까?

  그러나 환자를 쓰다듬기만으로 낫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KAL의 경우, 우리의 동정과 관용이 지나쳐서 오히려 병세를 더욱 위중하게 만들지는 않았던가? 이제는 따뜻한 간호만큼 차가운 메스도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필자가 여기서 KAL에 들이대려고 하는 칼은 난도질용이 아니라 수술용이며, 드는 매는 몽둥이질하려는 게 아니라 채찍질하자는 것이다. 이 기사는 대한항공의 실질적 주인인 趙重勳(조중훈) 회장이나 조종사들을 위한 글이 아니다. KAL기에 목숨을 맡기는 年 4백80만 명(1983년)의 승객들을 위한 글이다. 공무원들을 비롯한 많은 해외 여행자들에게 KAL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숙명이다. KAL의 안전은 바로 우리의 안전이다. KAL에 대한 건강 진단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KAL은 다름아닌 「우리의 날개」이니까.

  지난(1984년) 1월12일 오후 2시50분, 나는 취재를 마치고 日本 후쿠오카 공항에서 대한항공 A300기에 몸을 실었다. 1시간10분 뒤 약 2백명을 태운 A300은 金浦(김포)공항 상공에 도달했다. 폭설이었다.

  여객기는 눈발이 걷히길 기다리며 홀딩(대기 선회)에 들어갔다. 우리 비행기뿐 아니라 3~4대의 여객기가 金浦 상공에서 층층이 대기 선회를 하고 있었다.

  조종사들이 「곶감 꿴다」고 말하는 게 이런 홀딩이다. 선회 비행기들은 상하로 300m씩 분리되긴 했지만 지척이 안 보이는 구름 속에서 덜컹거리며 뺑뺑 도는 건 기분 나쁜 일이었다. 조종사들도 약 4분마다 1회전하는 홀딩 선회를 몇 번 계속하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약 30분간 선회하다가 A300은 착륙 허가를 받았다. 꿰인 곶감처럼 돌고 있던 비행기들은 폭설이 끝나자 밑에서부터 차례로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벨트를 매라」는 기내 방송과 함께 A300은 구름을 뚫고 다이빙을 시작했다.

  A300은 활주로로부터 반사되는 수직·수평의 유도 전파를 약 7백50미터 상공에서 포착했다. A300은 이 전파가 만든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을 따라 활주로를 향해 3도 경사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활주로가 곧 기장의 시야에 들어왔다.

  착륙 바퀴를 내리는 「꺽」 소리가 기내에선 반갑게 들려왔다. 늦어도 2분이면 착륙이다. 바로 이 순간 金浦 타워 관제사가 다급하게 조종사를 불렀다.

  『고어라운드!』

  A300은 갑자기 기수를 치켜들고 급상승을 시작했다. 승객들의 얼굴엔 불안의 표정이 역력했다. 활주로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우리 비행기 바로 앞에선 착륙한 대한항공 소속의 다른 A300기가 정류장으로 빠지는 誘導路(유도로)를 향해 좌회전하는 순간 활주로를 벗어나 맨땅에 박히고 말았다.

 金浦 타워 관제소에서는 이 사고를 알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기장은 엔진에 힘을 주어 비행기를 활주로 위로 끌어올리려다가 더 깊숙이 빠지고 말았다.

  그제야 그는 무전으로 황급히 관제소에 사고 사실을 알렸다. 내가 탄 A300기가 활주로에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관제소가 황급히 착륙 중지 지시를 내린 것이 이 때였다. 활주로는 그 뒤 1시간30분 동안 폐쇄됐다. 우리 비행기는 金海(김해)공항으로 날아가 착륙, 2시간쯤 기다리다가 다시 金浦로 올라왔다.

  

  조종실의 對話 부족이 사고 원인

  

  이번 취재를 하다가 우연히 이 A300기의 당시 기장 朴모 씨(55)를 만났다. 그는 지난 2월1일자로 정년 퇴직했다. 원래는 3월 말에 퇴직하고 회사의 배려가 있으면 촉탁으로 계속 조종간을 잡을 수 있었으나 폭설 속의 그 비행이 문제가 됐던 것이다. 金浦에서 착륙을 포기하고 재상승했을 때 朴 기장은 어느 교체 항공으로 갈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KAL이 지정하고 있는 金浦 폐쇄시의 교체 공항은 서울 근교의 ○○비행장과 金海다. 당시 ○○비행장 상공에서는 임시 착륙하려는 비행기들이 많이 몰려 선회중이었다. 朴 기장은 金海로 결정했다.

  『기수를 남쪽으로 돌렸을 때 항공 기관사가 그때야 「회사에서 ○○으로 가라고 하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지금 와서 그런 말을 전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버럭 화를 내곤 金海로 갔다』

  金海에 내려 연료 잔량을 조사했다. 약 1천5백kg. A300이 약 15분간 뜰 수 있는 양이었다. 만약 예기치 못한 일로 金海 활주로마저 폐쇄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당시를 회상하니 오싹해졌다. 우리 나라 항공법은 여객기가 반드시 실어야 할 法定(법정) 연료를 규정하고 있다. 목적 항공까지의 비행 연료에다가 이 연료의 10%를 비상용으로 더하고, 목적 공항에서 교체 공항 상공에서 30분 동안 홀딩할 수 있는 연료를 추가한다.

  이 법정 연료 이외에 항공사마다 약간의 예비연료를 더 싣기도 한다. 朴 기장이 몬 A300은 후쿠오카에서 약 16t의 제트油를 싣고 떴었다. 金浦 상공에서 홀딩하면서 기름을 많이 써 착륙 포기를 했을 땐 약 6.4t이 남아 있었다. KAL에선 『그런 적은 양으로 왜 먼 金海로 갔느냐?』고 朴 기장을 문책, 그를 조기 퇴직시킨 것이었다.

  『기장으로서 내가 책임을 진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게 된 원인은 조종실 승무원(기장, 부기장, 기관사)끼리의 대화 부족이었다. 홀딩, 착륙, 시도, 포기 등의 과정에서 나는 조종간을 꽉 붙들고 진땀을 뺐다. 이럴 땐 부기장과 기관사가 알아서 제때 제때 비행정보를 기장에게 제공, 그의 판단을 도와야 한다. 그날 착륙 포기 뒤 급상승했을 때 기관사가 즉시 연료 잔량이나 회사의 지시 사항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金海로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朴 기장은 『항공기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조종실 근무자끼리의 의사 소통 부족이다』고 거듭 강조했다.

  

  착각의 연속이 부른 충돌 사고

  

  「우리의 날개」 KAL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12월23일 오후 2시21분 美國(미국) 앵커리지 공항에서 일어난 KAL 화물기 충돌 사고의 우리 측 조사 결과는 나라 안에선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자가 이번 취재로 알아낸 진상은 이렇다.

  사고 당시 앵커리지 공항은 폭설 뒤 안개로 싸여있었다. DC10 기장 李範熙(이범희) 씨는 활주로 32를 사용, 이륙하라는 관제소의 지시를 받았다. 이 공항에는 3개의 활주로가 있었다. 李 기장은 정류장에서 DC10을 몰고 활주로 32를 찾아나섰다. 앞뒤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었지만 李 기장은 경험을 되살려 誘導路(유도로)를 따라 두 번 우회전을 한 뒤 활주로에 진입했다. 유도로에서 李 기장은 『좀 이상한데 잘못 든 게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곧 DC10은 이륙을 위한 활주에 들어갔다. 비행기 속도가 60, 80, 90노트로 올라가고 있는데 활주로 저 끝에 경비행기가 한 대 서 있지 않은가? 그때는 이미 두 비행기의 거리가 20m도 되지 않았다. 李 기장은 『아차! 실수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가 죽더라도 저 비행기는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순간으로 나더라고 했다. 그는 경비행기를 피해 좌회전하면서 기수를 치켜 올렸다. 앞이 번쩍 들린 기체의 가운데 바퀴가 경비행기의 날개와 부딪쳤다. DC10은 활주로를 너머 잡목이 있는 눈덮인 맨땅을 계속 질주했다. 李 기장은 『이게 마지막이다』고 체념하면서 정신을 잃었다. 기름 64t, 화물 62t을 실어 자체 무게가 약 2백 50t이나 되었던 DC10은 울퉁불퉁한 맨땅을 달리면서 불덩어리로 변해갔다. 날개, 바퀴는 산산조각나고 동체의 뒷부분도 부러져 나갔다. 조종석이 있는 앞부분이 떨어져나가 구르다가 섰다. 조금만 더 달렸으면 해안 절벽을 넘어 바다로 떨어졌을 자리에 정지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세 승무원은 조종석 창문을 열고 탈출, 목숨을 보전했다. 경비행기의 동체는 기적적으로 다치지 않았다. 거기에 탔던 승객 7명도 가벼운 부상을 입었을 뿐이었다. DC10에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면 태반이 죽었을 것이다.

  ㅏ자 모양의 두 활주로 가운데 KAL기가 뜨기로 돼 있었던 것은 ㅡ자 활주로였다. 그러나 KAL기는 ㅣ자 활주로에 들어와 활주를 시작했다.

  그것도 출발선에서 활주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 활주로의 약 4분의 3을 잡아먹은 지점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달릴 활주로는 8백m뿐이었다. DC10은 2천m 이상은 달려야 뜬다. 만약 경비행기가 활주로 끝에 없었더라면 KAL기는 이륙 전에 그대로 활주로를 너머 맨 땅을 지나 해안절벽을 뛰어넘고 바다로 처박혔을지도 모른다.

  李 기장은 엉뚱한 활주로로 들어갔을 뿐 아니라 그 활주로의 중간에 진입해 놓고서는 출발선에 있는 것으로 오인, 활주를 시작한 2중 착각을 했던 것이다. 당시 활주로 주변의 각종 표지판은 눈에 파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조종실에는 여러 개의 나침반이 있었다. 그 바늘은 KAL기가 떠야 할 3백20도 방향(기수 방향)을 가리키고 있어야 했다(실제 나침반은 2백4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종실 근무자 3명 중 아무도 이 나침반을 확인하지 않았다. 길을 잘못 든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기장까지도. 「魔(마)가 끼였다」고 하면 운명론은 될지언정 합리적 지적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륙 전 점검 사항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었을까? 李 기장은 『바깥에 너무 신경쓰다가 보니 나침반 보는 걸 깜박 잊었다. 육상에서는 계기를 보면서 비행기를 모는 일이 거의 없다. 나침반 확인이 습관화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런 불안한 상황에서도 「그 습관」이 기장의 행동을 지배했다는 것은 KAL조종사들의 루틴 체크 자세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INS 사고 많았다

  

  지난해 12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작성한 소련기에 의한 KAL007 점보기 격추 사건 조사보고서는 대한항공에 유리한 내용만 담고 있지는 않았다. 보고서는 스파이 비행설, 연료 절감을 위한 항로 단축설을 일축하면서도 항로 이탈의 책임을 KAL 조종사에게 슬쩍 돌렸다. 이 보고서는 관성 항법장치(INS) 3대의 동시 고장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 대신 조종사의 조작실수 가능성을 두 가지로 추정했다.

  첫째는 KAL 조종사가 앵커리지 이륙 직후 비행 방향을 나침반 침로 2백46도로 맞춰 놓았다가 북태평양 상공 깊숙이 들어가서도 INS 유도 방식으로 스위치를 돌려 놓은 것을 잊어먹었다는 추정이다. 즉 007기는 INS로 유도되지 않고 나침반 침로 2백46도에 계속 이끌려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둘째는 조종사가 INS에 출발 지점 현재 위치(앵커리지 공항)를 찍어 넣을 때 경도를 실제보다 10도나 동쪽으로 誤入(오입)시켰다는 추정. 조종사는 오입된 걸 모르고 INS에만 유도를 맡겼다가 소련 쪽으로 흐르게 됐다는 얘기다.

  모의 시험 결과에 따른 이 추정을 KAL에선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결정적인 정보가 없는 지금 추정은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007사건 직후 많은 전문가들은 정확 무비한 INS를 장착한 비행기의 항로이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INS는 결코 만능이 아니며 그런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KAL에선 알려지지 않은 INS 사고사례를 더러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82년 9월28일 파리의 오를리 공항에서 KAL의 DC10 여객기가 이륙했다. 약 20분간 북쪽으로 비행한 뒤 禹(우) 기장은 운항 방식을 INS로 바꿨다. 목적지는 앵커리지. 그런데 비행기가 거꾸로(남쪽으로) 내려가지 않는가? 기장은 INS에 출발지 위치(오를리 공항)를 잘못 찍어 넣었음을 깨달았다. 일단 이륙한 뒤에는 출발지 위치를 고칠 수 없다. 내버려 두면 INS는 엉뚱한 곳으로 비행기를 몰고 간다. 그렇다고 INS를 꺼버릴 수도 없다. 지상 항법 보조 시설이 있는 육지 상공에선 INS가 없어도 날 수 있다. DC10이 날기로 돼 있었던 것은 북극 항로였다. 이런 곳에선 편차가 심한 나침반을 믿고는 비행할 수 없다.

  禹 기장은 귀환을 결심했다. 먼저 약 1천4백만 원어치나 되는 45.3t의 기름을 바다 상공에서 뿌려야 했다. 착륙가능 무게에 맞추기 위해서 였다. 禹 기장은 착륙 후 출발 위치를 수정, 다시 이륙, 무사히 운항을 끝냈다.

  禹 기장은 20일간의 운항 정지 처분을 받았다. 이와 비슷한 INS 사고는 호놀룰루 공항 등에서 몇 번 더 있었으나 처벌을 각오한 KAL 조종사들의 용기 있는 귀환 결단으로 더 큰 사고는 모면되었다.

  

  틈만 있으면 끼여드는 魔

  

  INS에의 위치 입력은 이렇게 한다. 먼저 비행기를 정지시킨 다음 INS 스위치를 「스탠드 바이」 자리에 놓고 3대의 INS에 따로따로 출발지 위치를 찍어 넣는다. 보통은 부기장이 입력, 기장이 점검한다. 그 다음에 스위치를 「얼라인먼트」(정지) 자리로 돌리고 9개의 통과 지점 위치를 쳐 넣는다. 그런 뒤 15~30분쯤 기다리면 표시등에 초록 불빛이 들어온다. 불빛이 들어오기 전에 비행기를 움직이면 입력된 자료가 흐트러져 INS는 작동되지 않는다. 그린 라이트가 들어오면 INS 스위치를 「네비게이션」(운항) 자리로 돌리고 이륙할 수 있다.

  오를리 공항 사고조사 결과에 따르면 禹 기장은 그날 좀 바빴다고 한다. 이륙 전의 운항 브리핑이 늦어졌고 이륙 허가도 늦게 나왔다. 손님들이 탈 무렵 그는 조종실에 들어갔다. 부기장과 기관사가 INS에 찍어 넣은 위치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원래는 기장이 확인해야 하는데 이륙 시간이 임박한 데다가 부기장이 이미 점검을 끝내고 이상이 없다고 해서 재확인을 생략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출발지 위치(오를리 공항)는 동경 몇도인데 서경으로 잘못 入力(입력)되었음이 뒤에 밝혀졌다. 앵커리지 사고와는 규모가 다르지만 「눈의 착각」과 「루틴 체크 생략」이 겹쳐서 일어났다는 점에선 같다.

  INS 3대에 항로 좌표를 入力할 때는 약 5백개의 숫자를 찍어 넣는다. 여기서 숫자 하나만 잘못되어도 안 된다. 조종사들은 컴퓨터에서 쳐 나온 비행 계획서를 보고 단추를 두들긴다. 이 컴퓨터 글자체는 한국인에겐 낯설고 0이나 3이 8로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세 사람이 차근차근 크로스 체크를 하면 문제는 없다. 조종사들도 인간인지라 일상적인 반복 체크에 싫증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약간의 틈 속으로 魔(마)가 끼여드는 것이다.

  

  대사고 막은 대만 상공의 좌선회

  

  007사건 직후인 지난해(1983년) 10월 어느날 사우디 아라비아 다란에서 출발한 KAL의 DC10 여객기가 방콕에 기착했다가 다시 서울을 향해 이륙했다. 대만 남쪽 마콩 섬 상공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비행기가 왼쪽으로 도는 게 아닌가? 약 23마일이나 중공 쪽으로 항로를 벗어나면서 좌선회를 하자 조종실에선 야단이 났을 것이다. INS를 확인하니 마콩 상공 다음의 통과지점은 대만의 대북인데 入力한 대북 좌표의 경도 부분이 지워져버렸음을 알아냈다. 마콩까지 DC10을 잘 끌고 온 INS는 다음 통과 지점이 어딘지 모르게 됐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선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대만 관제소에서는 『당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추궁하기도 했다. 다행히 통과 지점의 수정은 비행중에도 가능하다. 玄(현)모 기장 등 조종사들은 다시 좌표를 입력, 서울까지 비행기를 몰고 올 수 있었다. 조종사들이 그래도 계기관찰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에 007사건의 재판은 모면되었다. 007사건 직후 INS조작에 대해 신경을 잔뜩 쓰고 있는 중에서도 이런 사고가 났다는 것은 「INS 맹신자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 사고가 入力 잘못인지 계기 잘못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어느 퇴직 조종사는 이런 말을 했다.

  『INS 사고를 낸 조종사들을 문책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문책을 너무 두려워하다가 더 큰 사고를 일으킬 수도 있다. 가령 호놀룰루에서 이륙한 직후 조종사가 출발 위치 誤入(오입)을 알았다고 하자. 그는 먼저 막대한 양의 기름 방출과 회사에 돌아갔을 때의 처벌을 걱정하게 된다. 그래서 INS 대신 나침반만 믿고 이판사판으로 태평양을 횡단하는 일대 모험을 하려는 충동에 빠지지 않을까? 무사히 가기만 하면 자기들끼리 입을 다물고 그 사실을 영원히 비밀로 할 수 있으니까…』

  이 조종사는 「이판사판」이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가정법상의 설명을 아주 사실적인 투로 얘기했다. 『자신의 처벌보다는 승객들의 안전에 더 신경을 써 출발 공항에 돌아가는 기장은 오히려 표창해야 한다』는 그 조종사의 말에는 일리가 있는 듯했다. KAL 여객기의 조종실에 편승, 慣熟(관숙) 비행을 한 교통부 소속 어느 관제사는 이런 얘기도 했다.

  『007 사건 뒤였기 때문에 일부러 북태평양 항로를 택했다. 야간 비행중 바깥을 봐야 지표가 될 만한 건 있을 리 없었다. 믿는 것은 오직 작은 INS 상자뿐. 조종사에게 「지금 INS가 아웃돼버리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3대가 동시에 그렇게 될 수야 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일단 그렇게 가정해 보자」고 했더니 「나도 어째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관제사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요즈음의 조종 시스팀이 너무 INS에 의존하고 있는 관계로 나침반과 해·별자리를 계산하여 하늘을 날던 본래의 비행감각이 점점 무디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007 사건 이후 미국의 항공 전문가들은 『한국 조종사들은 INS에 좌표를 찍어 넣을 때 3명이 따로따로 하지 않고 리모트 모드로 3대의 INS를 연결 한 사람이 동시에 쳐 넣은 습관이 있다』고 말했다. KAL 조종사들은 리모트 모드의 동시 입력 방식은 입력 후 상호체크만 제대로 하면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KAL 조종사들의 가장 큰 취약점은 이 루틴 체크의 소홀인 것이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미국 항공 우주국은 지난 5년간 미국 조종사들이 경험한 21건의 INS사고 사례를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사고 원인도 KAL의 경우와 비슷하다. 007사건은 INS의 신화를 깨뜨렸다는 점에서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로고 조명등을 안 껐더라면…

  

  KAL기 사건에 대한 ICAO보고서에는 사할린 상공 피격 현장의 피격 당시의 밝기에 대해 쓰고 있다.

  「달은 하현이었고 수평선 위 60도 각도에 있었으며 야간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보고서는 또 「KAL기의 수직 꼬리에 달린 로고(社章)조명등은 보통은 켜지만 켜고 안 켜고는 기장 마음대로다」고 했다. 이 문제는 KAL 조종사들 사이에 한동안 화제가 됐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ICAO 보고서는 잘못 적고 있다. 「로고 조명등」은 보잉747, DC10, A300 등 대형기의 꼬리 날개에만 있다. 수직 꼬리에 크게 그려진 KAL 마크를 양쪽의 수평 날개에 붙은 조명등이 비춰 KAL에선 3년 전 이것을 켜지 말도록 조종사들에게 지시했다. 「전구수명을 아끼자』고 그랬다는 말도 있고 『정비 부서 쪽의 요청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고공에선 충돌 위험이 없으므로 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도 있다. 이 조명등을 켤 법적 의무는 없다. 일부 조종사들은 그러나 회사의 소등 지시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비행기 회사에서 만든 것은 그대로 작동하는 게 원칙이다』는 반론이었다. KAL은 007피격 뒤부터는 이 조명등을 다시 켜도록 했다. 『만약 그때 KAL 007기가 로고 조명등을 켜고 있었더라면 소련 요격기들은 6~8마일 바깥에서도 민항기임을 알았을 터이고 KAL기를 스파이기라고 한 그들의 거짓말은 더욱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철면피 같은 소련 요격기 조종사도 너무나 뚜렷한 KAL 표시를 보고서는 생각을 달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로고 조명등이 켜졌더라면 사건의 파국을 막아 주었을지도…? 당시의 어둠에선 요격기 조종사가 2천 피트 위에 있는 KAL기의 동체에 씌어진 글씨를 판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판독가능 거리에 접근했을 때는 이미 발사 명령을 받은 뒤여서 그런 문제엔 신경도 안썼을 터이고…』

  이런 부질없는 상상을 하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닌 듯하다. 이 사례를 소개하는 것은 KAL을 나무라자는 것이 아니다. 앵커리지 사고나 INS 사고의 원인을 살펴보면 사고는 한 가지 요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불운이 겹칠 때 사고가 터진다. 오를리 공항에서의 INS 入力 잘못은 入力者의 실수, 점검자의 과실, 기장의 확인 생략이 겹쳐서 일어났다. 앵커리지 사고는 안개, 유도로 착각, 나침반 확인 생략 등의 요인이 동시 발생하여 터졌다. 007 참극은 항로이탈, 항로 이탈 비행기에 대한 관제소의 경고 생략, 소련의 냉혈한 대응 등이 겹쳐서 빚어졌다.

  이론상으로는 항공기는 절대 사고를 낼 수가 없다. INS, 기상 레이다, 나침반, 방향 지시기, 엔진 등 중요 장치는 3중, 4중으로 안전보장(Fail Safe)이 돼 있어 한둘이 마비돼도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돼 있다. 그래도 사고가 나는 것은 동시에 여러 장치가 마비되든지, 동시에 조종사와 정비사가 여러 가지 실수를 연발했을 때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협력해야 비행사고를 낼 수 있다』는 우스개가 나돈다. 이런 상황에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원리 원칙대로 하는 것이 안전의 지름길이다. 그런 뜻에서 KAL이 다시 로고 조명등을 켜기로 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다.


태양 자리 바뀐 것도 몰라

  

  지난 1978년의 무르만스크 강제 착륙 사건은 KAL 조종사의 장단점과 대한항공이 지닌 기업으로서의 윤리 수준을 극명하게 보여 준 가장 KAL的인 사고였다. 神技(신기)의 비상 착륙을 할 수 있었던 기장이 왜 그토록 어처구니 없는 항로 이탈을 몰랐던가? 「大韓航空十年史(대한항공 십년사)」는 이 사고를 설명하면서 「…정비 불량이나 조종사의 실수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느니 「불의의 총격으로 보아 소련 영공을 침범했던 모양이다」고 하고 「다급한 상황 속에서도 전 승무원들의 마음가짐은 침착했고 책임감은 투철했다」고 기록했다.

  우리 정부와 법원의 판단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정부의 조사 보고서는 공개된 적이 없다. 법정에 증거로 제출된 적은 있다. 당시 미사일 파편을 맞고 숨진 두 승객 중 한 사람인 方태환 씨(당시 대우개발 사원)의 유족들은 대한항공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서울지법에 냈었다. 서울지법에선 원고 승소, 서울 고법과 대법원에선 원고 패소로 판결, 확정됐다. 패소 이유는 대한항공의 과실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원고 측에서 시효를 넘기고 나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었다.

  한국도 가입한 바르샤바 항공 운송 협약은 사고 발생 후 2년 이내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方태환 씨의 아버지 方현모 씨에 따르면 대한항공과 배상금 문제로 협상을 벌이다가 시효를 넘겼고 대한항공 측에선 소송 시효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려 주지 않더라고 했다. 『그런 국제 협정이 있는지 우리 같은 시민이 어떻게 알겠는가? 나라를 대표한다는 대한항공이 할 짓이냐?』는 게 그의 원망이다.

  方 씨 유족은 1심에서 승소하자 배상 청구액의 일부인 1천9백여만 원을 KAL로부터 가압류했었다. 2심에서 KAL이 승소하자 KAL측 변호인은 『판례를 남기고 싶으니 상고를 해달라. 그러면, 1천9백만 원은 돌려받지 않겠다』고 하여 方현모 씨는 그렇게 했다고 한다.

  서울 지법과 고법은 그러나 한결같이 이 사고에 대한 대한항공의 과실만은 인정했다. 그런 판단은 정부의 사고 조사보고서에 근거한 것이다.

  「…그린란드 동남방 메스터빅을 통과한 후 북극 항로에서 비행 방향의 설정 기준이 되는 방향 자이로에 내부 결함이 생겨 과도한 내부 오차가 발생했다. 북극 항로는 8시간 이상 되는 난 코스로서 INS가 설치되지 아니한 위 여객기에 항법사로서 탑승한 이근식은 지상 항법 보조 시설, 천체 관측, 육안에 의한 지점 확인 등으로 운항 위치를 확인, 수시로 방향 자이로가 극지에서 일으키는 오차를 수정하여야 했었다. 이근식은 이 주의의무를 태만히 하였다. 불량한 자이로가 지시하는 인공 자오선 항로를 따라 운항하도록 방치했다. 여러 가지 보조 항법을 통한 위치 확인 및 항로 수정작업도 하지 않았다. 여러 과실이 경합되어 이 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달리 반증이 없다」(1983년 3월29일 서울고법 판결문의 일부 요지).

  이 재판의 법정에서 사고 비행기인 보잉 707기장 金暢圭(김창규) 씨는 『기장적 뒷자리에 앉은 이근식 씨에게 항법 장치의 이상 유무를 물었으나 정상이란 대답을 들었다』면서 『항법사의 잘못으로 소련 영공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증언했었다.

  지난해(1983년) 11월호의 일본 월간지 文藝春秋(문예춘추)에는 「무르만스크 총격 사건의 怪」라는 기사가 실렸다. 필자 오오우치 세이코는 707기에 탔던 일본인 승객들의 체험담을 기사로 재구성했는데 이런 대목들이 있다.

  「스튜어디스에게 어디냐고 물었더니 『알라스카에 불시착할 예정이며 구조대가 이미 대기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승객 오오야(大谷) 씨는 왼쪽 창밖에 있어야 할 태양이 어느새 오른쪽으로 돌아와 있음을 알았다. 조종실에 앉은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냥 창 밖을 보기만 했더라도 눈치챘을 이런 이상 사태를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알라스카로 피항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생긴 것이 아닐까?」

  「오오야 씨가 金 기장에게 계기(필자 주: 항법 계기를 의미한 듯)에 대해서 물으니 金 기장은 항법사 쪽의 계기는 이륙 당초부터 고장이 나 있었다고 했다」

  「소독약도 실려 있지 않았고 산소통은 여섯 개 있었지만 밸브가 녹쓸거나 열어보니 비어 있는 등 반수가 못 쓸 것이었다」

  「管野(스가노) 씨는 동생이 죽은 직후라 한국 승무원에게 엄하게 다그쳤다. 어느 승무원이 더듬더듬하는 일본어로 『용서하십시오. 카드를 하고 있었습니다』고 말하는 것을 확실히 들었다」

  이 대목들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태양 방향이 비행기 왼쪽 창쪽에서 오른쪽으로 바뀐 것을 승무원들이 몰랐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KAL기는 당시 북동쪽으로 가다가 거의 1백80도로 U턴했으니 태양 방향이 바뀔 수밖에. 사고 조사 보고서와 체험담을 종합해 보면 KAL승무원이 루틴 체크의 원칙을 무시한 게 사고 원인이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어느 일본인은 이런 평을 한다.

  『KAL 조종사들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부드럽게 착륙을 할 것이다. 승객이 接地(접지) 사실을 모를 정도다. 전투기 조종사 출신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비상시의 임기응변도 굉장히 잘 한다. 그러나 근무 자세에는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원칙을 잘 따르지 않는다든지…』

  대한항공의 社史(사사)는 이 비극적인 무르만스크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 그들의 책임을 호도하고 잘한 것만 추켜세움으로써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고 있다. 잘못에 대한 치열한 반성이 없을 때 그것이 교훈으로 남을 리가 없다. 「역사의 깨우침을 모르는 자에게 그런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뜻을 KAL은 진지하게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趙重勳 회장은 『경영은 종합 예술이다』는 말을 자주 쓰는 모양인데 도덕성이 빠진 예술은 기교일 뿐이다.

  

  위기 극복보다는 위기 예방

  

  지금까지 예로 든 KAL 조종사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조종 기량은 세계 도처에서 특출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평가 속에 KAL 안정성 문제의 핵심이 있다. KAL 홍보 자료는 조종사들의 우수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5백90명(1983년초 현재)의 조종사 가운데 20년 이상 경력자가 3백57명, 16~20년 미만 경력자가 67명, 10~16년 미만이 67명으로 16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노련한 조종사가 전체의 72%나 된다. 비행시간으로 보면 2만 시간 이상 조종사는 1백77명으로 전체의 30%다」(民航14년, 어제와 오늘)

  KAL은 1980년 11월에 일어난 점보기의 金浦공항 착륙 화재 사건까지는 「조종사의 과실에 의한 승객 사망 사고가 없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항공사」라고 뽐내기도 했었다.

  사실 KAL 조종사들처럼 전투기와 여객기를 두루 경험하고 긴 비행경력을 쌓으며 아슬아슬한 위기를 많이 극복한 조종사들은 세계에서도 드물다. 앵커리지 사고처럼 「재수없게」 터져 자빠진 「빙산의 일각」 밑에는 얼마나 많은 위기 일발의 순간들이 있었을까? 간신히 모면된 사고의 터진 사고의 차이는 운수일 경우가 많다. 사고 미수가 많이 생기면 진짜 사고도 많이 나는 법이다.

  항공기의 안전은 예방 개념과 「제로 디펙트」, 즉 완전 무결의 개념에 입각하고 있다. 항공기는 자동차와는 달리 인간 생존이 불가능한 허공속을 달린다. 자동차는 엔진이 꺼질 때 세우고 고치면 되지만 비행기는 그럴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조종사라도 비행 사고에선 대처하는 데 매우 미약한 재량을 가질 뿐이다. 비행 안전에선 위기 극복보다 위기 예방이 더 중요하다. 그런 뜻에서 훌륭한 조종 기술보다는 뛰어난 안전 관리 시스템이 훨씬 소중한 것이다. 점보기의 부속품은 약 4백50만개나 된다. 99.9%의 정상가동률은 4천5백개의 부품이 고장난 것을 뜻한다. 항공 안전엔 오직 1백%의 완전 무결이 요구될 뿐이다. 우리가 항공사에 요망하는 것과 고속버스 회사에 요구하는 것이 같을 순 없다. 항공사에선 항공기들이 위험스러울 만큼 가깝게 비껴 지나가는 것을 「니어 미스」(Near Miss)라 하여 사고로 취급한다. 나도 「…할 뻔했던」 것도 사고로 생각하는 그런 자세로 KAL의 안전성을 따질 생각이다.

  

  비행기에도 있는 過積 사고

  

  007사건, 무르만스크 사고, 金浦 착륙 화재 사건과 함께 KAL의 4대 사고로 꼽히는 것은 1976년 8월1일 이란의 테헤란에서 일어난 보잉707화물기 추락 사고다. 李澾範(이달범)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 5명이 숨졌다. 당시 이 화물기는 빈 비행기였다. 이륙 직후 엔진 추진력이 제대로 나지 않아 비행기는 기우뚱 기우뚱 중심이 잡히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안정을 되찾기 위해 그 대책에 몰두하다가 좌회전하는 것을 잊어 먹고 그대로 오른쪽 산맥 끝을 들이받았다.

  작은 고장에 신경쓰다가 더 큰 실수를 발견 못해 대참사가 생긴 사례는 외국에도 많다. 이 화물기엔 정말 악령이 씌워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고 화물기는 하네다에서 방콕을 경유 테헤란에 도착, 짐을 부렸었다. 하네다를 이륙할 때는 근 36t이나 되는 화물을 실어 최대 이륙 중량에 꽉 차 있었다. 기장은 『너무 무겁지 않을까?』하고 걱정하면서도 이륙을 단행했다. 항공기가 활주할 때는 결심속도(VI)와 부양속도(VR)를 통과해야 한다. 결심속도는 비행기 무게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지만 대개 1백20~1백40노트(비행기 속도는 배와 같이 노트로 표시한다)다. 이 속도가 나기 이전에 엔진 마비 등 중대 고장이 발생하면 이륙을 포기할 수 있다. 포기해도 활주로를 넘지 않고 멈출 수 있다. 결심속도를 지나서는 설사 엔진이 하나쯤 마비되더라도 일단 이륙한 뒤 대책을 다시 강구해야 한다. 결심속도를 지나 이륙을 포기하면 활주로 끝을 넘어가 고꾸라져 박히기 때문이다. 부양속도는 대강 1백35~1백55노트다. 활주중 비행기가 이 속도에 도달하면 조종사는 조종간을 당겨 기수를 치켜 든다. 기체는 저절로 활주로를 떠난다.

  문제의 보잉 707 화물기는 하네다의 활주로를 아무리 달려도 이륙 속도가 나지 않았다. 화물을 너무 많이 실었기 때문이었다. 활주로 끝이 눈앞에 다가왔다. 할 수 없이 기장은 조종간을 당겨 올렸다. 부양 속도 이전에 기수를 치켜 올리는 것을 「강제 부양」이라 부른다. 707기는 기수가 올라가자 겨우 뜨기는 했다. 그러나 급상승을 하지 못했다. 거의 수평으로 동경만을 향해 날아갔다. 속도가 붙지 않으니 기체는 옆으로 비틀비틀 했다. 바다 위를 한참 비행한 뒤에야 속도가 올라 정상상승을 할 수 있었다. 방콕에서 이 승무원들은 내리고 교대하여 탑승한 組(조)가 이 비행기를 테헤란까지 몰고가 추락 사고를 일으켰던 것이다.

  대한항공 안전 관리실에서 펴낸 「安全情報(안전정보)」 1983년 7월호에는 過積(과적)으로 일어난 사고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1979년 1월 카리브海(해)의 생크루와 섬에서 이륙한 DH114型(형) 여객기가 비틀거리다가 오른쪽 날개를 아래로 하여 처박혔다. 승객 19명이 죽거나 다쳤다. 원인은 최대 이륙 중량보다도 4백60kg을 더 실었기 때문이었다. 운송 취급자가 기장에게 엉터리 중량을 통보, 기장은 이륙 때 적절한 추진력 계산과 조작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KAL은 이 「安全情報」에 자기네 회사의 사례를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이런 사례―.

  『1979년쯤으로 기억된다. 바레인 공항에서 점보기가 최대 이륙 중량으로 활주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부양 속도가 나지 않은 게 아닌가? 기장은 최후 수단으로 강제 부양을 시켜 일단 이륙은 했지만 기체는 바다 쪽으로 뒤뚱뒤뚱 내려갔다. 혼신의 노력으로 겨우 상승을 시키고 서울로 온 기장은 보고서를 회사에 냈다. 기장은 그 공항의 KAL 운송 직원이 귀국하는 중동 노무자들의 짐을 마구 실어주고는 초과 중량을 기록하지 않아 이런 비상 사태가 발생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기록상으로는 최대 이륙 중량을 넘지 않았으나 실제 중량은 한계 초과였던 것이다. 점보는 4백t 중량으로도 뜨지만 최대 이륙 중량에 5백kg 정도만 더 실어도 이륙 직후엔 무리가 온다. 바레인 사건 후 KAL 해외 지점에는 초과 적재 엄금지시가 내려갔던 걸로 안다』(A 조종사의 얘기)

  『나뿐만 아니라 많은 KAL 조종사들이 그런 강제 부양의 경험을 갖고 있을 것이다. 가끔 기장은 운송 취급자와 다투기도 했다. 기장은 이 무게로는 이륙이 어렵다 하고 운송 취급자는 괜찮다 하고. 뜰 때 조종간을 당겨보면 단번에 느낌이 온다. 저절로 욕이 나온다. 「이 개새끼들! 또 속였구나. 누굴 죽이려고!」 그래서 金浦에 돌아오면 화물을 전부 저울로 달아 보라고 호통을 치지만 잘 알다시피 KAL에선 조종사 끝발이 제일 약하지 않은가?』(B 조종사의 얘기)

  화물 트럭에나 있는 줄 알았던 초과 적재 현상이 여객기에도 있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비행기 탈 마음이 싹 사라졌다. 과다적재에 따른 강제 부양의 경험을 갖고 있다는 조종사를 나는 너무 많이 만났다. 어떤 조종사는 『중량을 속이는 것만큼 운송 취급자가 삥땅을 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했으나 나는 그런 확증은 갖고 있진 못하다. 조종사들은 강제 부양의 그 긴장 상태를 「반쯤 죽는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수백 명의 승객 목숨을 담보로 하여 소름끼치는 장난을 하는 사람이 지금은 KAL에 남아 있지 않으리라고 나는 믿고 싶다.

  

  영공 통과 허가 없어도 『일단 떠라!』

  

  과다 적재와 같은 크나큰 부조리에 대해서도 왜 조종사가 소신 있게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는가? 왜 그들은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야죠?』라고 넋두리를 하는가. 조종사를 외경해온 나에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또 이런 사례가 만나게 되었다.

  『얼마 전 S國(필자주: 국제 문제를 생각해서 국명은 밝히지 않는다)으로 전세 화물기를 몰고 갔다. 전세 비행은 부정기 항로이므로 영공 통과국으로부터 별도로 허가를 받은 뒤 떠야 한다. 나는 회사의 명령에 따라 뜨기는 떴는데 두 나라의 영공 통과 허가는 받지 못한 상태였다. 영공에 들어가려면 15분 전 그 나라의 관제소를 불러 허가 사항을 재확인한다. 문제의 두 나라 영공으로 나는 그냥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밑(관제소)에선 허가 번호를 대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신청 번호를 대고 우물쭈물 적당히 둘러댔다. 그러다가 보니 그 나라 영공을 다 지나가 버렸다. 그러다간 요격을 당하거나 강제 착륙당할 위험성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모험을 어디 날 위해서 했나? 회사 위해서 했지』

  이 퇴직 조종사가 그냥 통과했다는 나라 가운데는 게릴라전이 한창인 국가도 있었다. 정체 불명기라고 고사포를 쏘면 누구한테 원망할 것인가?

  다른 현직 기장의 경험담을 듣는다.

  『3년 전에 미국에서 카리브海의 ○○공항으로 화물기를 몰고 갔다. 영공 통과 허가 없이 F國을 지나려니 관제소에서 착륙하라는 게 아닌가? 나는 사정사정했다. 그곳에서 열 바퀴쯤 돌면서 떼를 쓴 덕분에 통과는 시켜 주었지만 아슬아슬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륙 전에 영공 통과 허락을 받아 놓아야 한다. 그러나 회사에선 신청은 다 돼 있으니 우선 떠라, 날아가는 동안 허가가 떨어질 것이라고 얘기한다. 막상 통과국의 영공 앞에서 관제소에 연락을 해보면 허가가 안 나왔다고 한다. 알아볼 때까지 홀딩하라는 나라도 있고 비껴 가라는 나라도 있다. 만만하게 보이면 얼렁뚱땅 그냥 지나가 버린다. 이래선 안 되는데…』

  이 경우에는 KAL 조종사들은 회사의 부당한 비행 요구를 거절할 힘이 없는 것 같다. 이런 행동을 계속 방치하다간 더 큰 국익 손상이 온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KAL 측이 멀지 않아 양식을 되찾을 것으로 기대할 수밖에 없다.

  

  무리한 비행을 부추길 때

  

  「조종사의 허약함」을 보여 주는 또다른 이야기 한 토막. 1970년대 말 중동을 출발, 방콕에 내린 KAL 화물기 보잉 707의 한 엔진에서 엔진 오일이 새기 시작했다. 미국인 항공 기관사는 이 고장을 고쳐야 비행할 수 있다고 했다. 본사에선 『서울로 몰고 와서 고치자』고 했다. 미국인 기관사는 『이 고장은 비행 가능 한계 이하이니만큼 나는 못 타겠다』고 비행기를 내버렸다. 그러나 다른 조종사 崔 모 기장은 이 비행기를 몰고 서울로 돌아왔다. 회사에선 崔 기장을 표창했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지금도 崔 기장을 비난하고 있었다.

  『崔 기장은 그때 당연히 비행 거부를 했어야 했다. 그런 상태에서의 비행은 규정 위반이다. 혼자선 칭찬받았지만 그런 사람 때문에 원칙대로 하려는 조종사들은 회사에서 따돌림받는다』

  이런 무리한 운항의 사례는 많다.

  지금은 KAL을 그만둔 객실 사무장 출신의 金모 씨는 이런 경험담을 털어 놓았다.

  『1976년이나 1977년으로 기억하는데 낡아서 세워 둔 보잉 720기를 다시 끄집어 내어 비행시킨 적이 있었다. 갑자기 늘어난 국내선 손님을 모시기 위해서였다. 金浦에서 釜山(부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무심코 날개 쪽을 바라보니 물방울 같은 것이 날개에서 새나와 흩어지고 있었다. 釜山에 내려 정비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게 물방울이 아니고 기름 방울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지난 1980년 11월19일의 점보기 金浦 공항 착륙 화재 사건도 조종사의 무리한 착륙 시도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사고 당시인 오전 7시25분께의 金浦 공항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육안 관측으로 시정이 8백m였다. 金浦 공항에선 시정 8백m 이하이면 착륙을 금지시킨다. 金浦 관제소에선 로스앤젤레스에서 밤새워 날아온 점보기에 착륙 허가를 내주고 『기상이 나쁘다』고 경고했다. 점보기는 전파 유도에 의한 계기 착륙법으로 활주로를 향해 접근했다. 이 접근법의 절차는 항공기가 유도 전파를 따라 결심고도인 지상 60m까지 도달해온 활주로를 맨눈으로 볼 수 없으면 착륙을 포기, 다시 상승(復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정이 8백m이면 결심 고도에서 활주로를 볼 수 있는 게 정상이지만 안개층이 깔린 고도나 항공기 위치에 따라선 안 보일 수도 있다. 이때 梁昶模(양창모) 기장은 결심 고도에서 활주로가 보이지 않았는데도 착륙을 포기하지 않고 더 밑으로 내려가 머뭇거리다가 활주로 바로 앞 맨땅에 처박힌 것으로 당시의 관제사들은 분석하고 있다. 『조금만 더 내려가 활주로를 찾아보자』는 미련이 순간적으로 점보기의 착륙 자세나 방향을 흐트러지게 했다는 해석이다.

  계기 착륙할 때 조종사들은 수직, 수평 전파가 만드는 자 표시의 중심점에 기체를 일치시키며 내려오다가 활주로를 보면 視界(시계) 비행으로 전환한다. 이 전환의 순간은 매우 위험하다. 눈을 계기에서 실물(활주로)에 적응시키는 것과 동시에 기체 자세를 맞춰야 하니까. 이 전환점에서의 찰나적인 머뭇거림이 참사를 유발한다. 왜 梁 기장은 과감하게 착륙을 포기하지 못했던가? 나는 만나는 KAL 조종사에게마다 그런 질문을 던졌다.

  

  아슬아슬할 때까지 대기 선회

  

  서울 지방 항공국 金浦 관제소에세 20여 년간 근무하면서 여러 항공사 조종사들을 상대해 본 고참 관제사는 이런 비교를 했다.

  『안전성 원칙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은 홍콩의 영국계 항공사 캐세이 퍼시픽(CPA) 조종사들이다. 그들은 金浦 기상이 나쁘다는 정보를 받으면 아예 접근도 않고 후쿠오카로 빠져버린다. 공항 상공에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대기 선회는 하지 않는다. KAL 조종사들은 아마도 가장 과감하고, 가장 회사 눈치를 많이 보는 축에 들 것이다. 그들은 金浦 관제소 영역 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KAL 운항 관리실과 연락, 그 쪽 지시를 받는다. 운항 관리사는 가능한한 착륙을 시키려고 한다. 날씨가 나빠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면서 홀딩을 시키고 조종사들은 이 방침에 적극 협조한다. 연료의 허용 한계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기다리는 KAL 조종사들에겐 동정이 간다』

  최근에 KAL을 떠난 어느 조종사는 『과감한 이착륙이 전투 조종사라면 몰라도 수백 명의 생명을 책임진 여객기 조종사의 미덕이 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자신도 KAL에 있을 때는 과감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동료들의 비행기는 다 내리는데 나만 안정성을 좋아하다가 안 내리면 무능한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대기 선회하다가 돌아간 뒤 날씨가 좋아지면 왜 좀 더 기다리지 않았느냐고 따질 것도 같아 될 수 있는 대로 회사 기분에 맞추어 주려고 한다. KAL 조종사 세계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다. 梁 기장의 착륙 실수 사건 때는 관제소에서도 잘 못한 점이 있다. 시정 8백m이면 한계치를 오락가락하는 수치다. 애매할 땐 활주로를 폐쇄해야 한다. 그래야 KAL 조종사들은 회사 눈치 안 보고 마음 편하게 착륙을 단념할 수 있다』

  보도안 된 또 한 건의 KAL 사고를 보자. 지난해 12월4일 앵커리지 공항은 안개로 뒤덮여 착륙 조건이 좋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출발한 KAL 747 화물기는 「과감하게」 착륙을 시도, 接地 자세를 취한 순간 옆으로 기우뚱, 날개의 엔진 부분이 땅을 긁었다. 白 모 기장은 즉시 착륙을 포기, 재상승했다가 다음번 시도에 성공, 무사 착륙했다. 엔진 긁은 실수로 해서 그는 귀국 즉시 회사로부터 두 달 동안의 운항 정지 처분을 받았다. 그 처분이 끝나기 사흘 전인 지난 2월6일, 교통부는 별도로 두 달의 운항 정치 처분을 추기시켰다. 앞뒤로 연타를 당한 白 씨를 동정하는 조종사들이 많다.

  

  무리를 유도하는 분위기

  

  「잘하면 충신 못하면 역적」이란 것이다. 『날씨가 나쁘다고 교체 공항으로 간 뒤 앵커리지 공항 날씨가 금방 좋아졌다면 그는 왜 더 기다렸다가 착륙하지 않았느냐고 비난을 받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운항 관리사가 시키는 대로 金浦 상공에서 홀딩을 하는데 기름이 줄어들어 조마조마해질 때까지 하기도 한다. 물론 회사에선 공식적으로는 「무리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실제 분위기는 그렇지않다』

  이 조종사도 「분위기론」을 들고 나왔다. 적어도 나쁜 날씨에 무리한 착륙을 하지 않았다고 처벌받은 조종사는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만난 많은 조종사들이 「분위기」를 들먹였다. KAL 안전 관리실에선 안전 관계 소책자에서 「착륙 포기는 잘못이 아니라 안전 운항이다」고 강조하고 있는데도 조종사들은 무리한 이착륙이나 운항을 하도록 하는 정시적 압박감을 늘 느끼고 있다고 했다. KAL 운항 규정은 비행중 비행 계획을 변경할 때는 「기장 및 운항 관리사의 합의에 따라야 한다」고 하여 기장에 대한 지상으로부터의 통제를 제도화 해 놓고 있다.

  이런 간여 이외에도 『누구는 내리는데 난들 못할소냐』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하는 식의 오기가 『일단 해보자』는 KAL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것 같다.

  지난 1월12일 말레이지아인 루이단키프 씨(27)가 10만 달러를 밀반출하려다가 金浦 공항에서 검거됐었다. 단키프 씨는 CPA 항공사의 여객기편으로 홍콩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여객기의 영국인 조종사는 활주로가 얼어붙어 미끌미끌한 것을 보고는 이륙을 못 하겠다고 선언했다. CPA의 어느 누구도 기장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KAL기 등 다른 여객기들은 모두 이륙하는데도 그 조종사만은 점보를 하루 재우고 다음날 이륙했다. 이 바람에 말레이지아인은 재입국하다가 외화 소지 사실이 들통났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단키프 씨에게 달러를 건네 준 것은 KAL의 金모 과장이었다. 그는 CPA도 KAL처럼 과감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회사에 손해를 끼칠망정 위험한 이륙은 못 하겠다는 CPA 기장의 인도주의적 용단은 그들이 철저한 신분 보장을 받고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KAL 조종사들은 도대체 어떤 처지에 있는가?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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