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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행이야기
아인트호벤에서 만난 히딩크 추억! 趙甲濟  |  2022-12-03
2004년 3월 나는 尙美會(상미회) 여행단과 함께 전자회사 필립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공업도시 아인트호벤에 가서 이 도시 축구팀 감독이던 히딩크 부부를 만나 점심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아인트호벤은 필립스의 본사가 있던 곳인데 人力(인력)조달이 어려워지자 본사를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연구소가 아인트호벤에 남았다. 인구가 약 20만 명인 공업도시인데 훌륭한 현대 미술관이 있다. 필립스는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電球(전구)를 유럽에서 맨 처음 대량 생산한 회사이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 일행을 축구팀의 홈 스태디움 식당으로 초대했다.
  
   일행중 20명 정도가 미리 준비하여 온 축구 공과 티 셔츠 등에 히딩크의 사인을 받았다. 일행중 한 분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에서 산 책을 내밀면서 사인을 부탁했다. 맞은편 자리에 있던 히딩크 감독은 책을 펴놓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만년필로 한 문장을 써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귀하가 이 책을 통해서 우리 역사의 아주 심각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입니다」였다. 안네 프랑크 가족 등 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사람들의 密告(밀고) 또는 협조에 의해 나치에 끌려가 희생되었다는 점에 대한 이 나라 사람으로서의 반성이 담긴 글이었다. 그냥 습관적으로 사인을 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깊이 한 다음 의미 있는 글을 써주는 히딩크 감독의 人格(인격)에 새삼 느끼는 바가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말을 잘 하는 사람이다. 표현이 절제되고 정확하다. 실용적인 네덜란드사람처럼 속이기 어려운 민족도 없을 것이다. 반면 명분론이 강한 한국사람처럼 속이기 쉬운 민족도 드물 것이다. 이성적인 민족과 감성적인 민족의 차이라고나 할까.
   히딩크 감독은 '한국 선수단을 맡아보니 한국인들의 本性(본성)을 알 수 있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잘할 때와 못할 때의 격차가 매우 커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날 히딩크 감독은 우리 여행단을 아인트호벤 축구장으로 안내해주고 다음날 경기에 초대까지 해주었다. 그는 '내일 게임엔 여러분을 위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출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아인트호벤에서 잠을 잔 뒤 전용버스편으로 독일의 아헨으로 건너가서 예약해둔 호텔에 들러 저녁을 먹고 다시 아인트호벤으로 와서 경기를 구경했다. 히딩크 감독이 경비원들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주어 늦었지만 입장도 쉽게 할 수 있었다. 프랑스 팀과 한 경기였는데 두 한국 선수가 맹활약한 덕분에 아인트호벤이 3-0으로 이겼다. 히딩크 감독의 배려가 고마웠다. 17세기는 '네덜란드의 세기'로 불리는데 이 나라 선원들이 한국에 표착하여 韓民族(한민족)과 처음 접촉한 서양인이 되었다. 이런 좋은 인연이 히딩크로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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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3년 동인도 회사 소속의 네덜란드 선박(스뻬르베르)이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를 출발하여 대만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 남쪽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破船(파선)했다. 36명이 해안에 표착했다. 그 중 한 사람이 헨드릭 하멜이었다. 13년 뒤인 1666년 하멜은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탈출했다. 이들을 조사한 일본 당국은 朝鮮(조선)정부에 나머지 선원의 송환을 요청했다. 조선은 생존자 7명을 일본으로 보내주었다.
  
   하멜 일행은 1667년10월 나가사키를 출항하여 바타비아로 돌아갔다. 하멜은 바타비아에 남았고 다른 7명은 하멜이 작성한 「하멜 보고서」 한 통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1668년 이 보고서는 암스테르담에서 출간되었다. 이어서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판으로 출판되었다. 유럽에 한국을 가장 소상히 알리는 책이 된 것이다.
   하멜은 조선 땅에 도착한 최초의 네덜란드인은 아니었다. 1627년에 얀 얀스 벨떠프레이라는 네덜란드인이 동료 두 명과 함께 표착했다. 그는 이름을 바꾸어 朴淵(박연), 朴燕(박연)이라 불리기도 했다. 武科(무과)에 합격하여 훈련도감에서 관직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朝鮮女人(조선여인)과 결혼, 조선땅에서 생을 마쳤다. 훈련도감에서 서양식 무기-홍이포와 조총을 개발하기도 했다. 하멜 보고서는 조선에 머물던 13년간의 밀린 봉급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쓴 것이다. 나가사키에 돌아간 직후 그곳에서 썼다고 한다.
  
   이 보고서는 일기체인데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이다. 하멜이 표류할 때부터 기록을 했고, 그 기록을 갖고 탈출하여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地名도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考證(고증)되었다. 하멜 보고서는 제주도에 표착하던 1663년8월15일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노를 내린 다음 즉시 닻도 내렸다. 그러나 파도와 수심 그리고 강한 바람으로 인해 닻을 바닥에 고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배가 해안가에 세 번 정도 부딪히더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下갑판 船室(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 갑판 위로 올라올 시간도 없었다. 갑판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배에서 뛰어내렸고 다른 몇몇은 파도 때문에 사방으로 휩쓸려 갔다. 해안에 닿은 사람은 15명뿐이었지만 대부분 알몸이었고 부상을 심하게 입었다. 바위 위에 앉아 있다 보니 난파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차츰 들렸다. 그러나 너무 어두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고 도울 수도 없었다.>(「하멜 보고서」-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 기획, 유동익 옮김, 중앙M&B 발간).
  
   하멜 일행중 생존자는 36명이었다. 그들은 우선 제주목사의 관할로 넘어갔다. 그해 10월 조정은 朴燕을 통역으로 파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50대 후반이었다. 하멜은, 네덜란드 사람인 朴燕이 처음에는 네덜란드 말을 잘 하지 못했으나 함께 여러 날 있는 동안 모국어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朴燕은 하멜 일행에게 『귀하들은 이 땅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는 암울한 충고를 했다. 하멜은 『우리는 통역을 구했다는 기쁨이 곧바로 슬픔으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하멜 일행은 서울로 불려 올라가 왕의 호위부대에 배속되었다. 2년 뒤 두 네덜란드 선원이 사고를 친다. 凊(청)의 사신이 서울에 왔다가 떠나던 날 헨드릭 얀스, 헨드릭 얀스 보스라는 두 선원이 凊의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어 있다가 뛰어들었다. 두 사람은, 凊 사신의 말머리를 붙들고 본국으로 송환시켜줄 것을 간청했다. 조선 관리들에게 넘어간 하멜 일행은 곤장 50대씩을 맞았다. 시위를 한 두 선원은 투옥되었다가 獄死(옥사)했다. 나머지는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하멜이 관찰한 조선인의 사는 모습과 관청의 하는 일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하멜은 가난에 찌든 조선인의 생활상을 개탄하듯 서술하면서도 높은 學究熱(학구열)에는 혀를 내두른다.
  
   <양반과 평민은 자식을 아주 잘 교육시키려고 한다. 그들은 밤낮없이 앉아서 글을 읽는다. 어린 소년들이 賢人(현인)들의 저서를 읽고 깨닫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승진의 證書(증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젊은 양반들이 늙었을 때는 가난해진다. 그들은 승진의 증서를 받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는데, 그들이 지불해야만 하는 기부금 마련에 때로는 재산이 부족하고, 그 비용은 지불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하멜은 조선인들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찰기도 더러 남겼다.
  
   <그들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며 속이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들은 온순하고 신앙심이 두텁다. 네덜란드 사람 벨떠프레이가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청나라가 얼음 위를 건너와서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숲속에 들어가 목 매달아 죽은 것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수가 적군에 맞아죽은 것보다 많았다고 한다. 그들은 싸우다가 누군가가 발 아래로 넘어지면 즉시 도망간다.>
  
   2004년 3월에 나는 헨드릭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컴市를 찾아갔다. 로테르담에 가까운 이곳은 강의 河口(하구)에 발달한 인구 약3만 명의 古都(고도). 하멜의 동상도 있고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하멜은 고향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동양학자들 사이에 그의 표류기가 유명해지니 고향에서도 뒤늦게 그를 기념하게 된 것이다. 나를 안내해준 시청 사람은 '작년은 하멜이 한국에 상륙한 350년이 되는 해여서 행사도 많았고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와 주었다'고 했다. 한글로 인쇄된 안내 책자도 있었다. 2003년 하멜 일행이 도착했던 제주도와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은 하멜과 관련된 행사를 많이 했다.
  
   선박 사무장이었던 하멜은 탈출한 뒤 나가사키에서 2년간 머물었다. 그는 네덜란드 식민지이던 인도네시아로 돌아가 활동하다가 1670년에 고향 호르컴에 일시 귀국했다. 그는 다시 인도네시아로 가서 살다가 돌아와 62세에 죽었다. 세계를 무대로 하여 떠돌며 살아가던 17세기 네덜란드人의 한 표본이다.
  
   하멜의 고향 도시도 사연이 많다. 1572년 네덜란드 독립군(신교도)은 지배자인 스페인 군대로부터 이 도시를 빼앗자말자 19명의 신부와 수도승을 목 매달아죽였다. 이들이 背敎(배교)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1574년 독립군은 水攻(수공)작전을 펴서 호르컴을 지켜냈다. 海面(해면)보다 낮은 네덜란드에선 둑을 터뜨려서 물바다를 만들어 침입군을 막아내곤 했었다.
  
   1629년부터 네덜란드는 水攻을 위한 둑을 전국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호르컴에는 그 둑이 좋은 산책로로 변해 있었다. 水攻 둑을 이용한 작전은 1672년 프랑스 군대를 무찌를 때는 효과가 있었으나 1794년 프랑스 군의 침공 때는 실패했다. 혹한으로 강물이 얼었다. 1940년 5월 나치 독일군은 이 水攻 둑 뒤로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고 폭격기를 보냈다. 水攻 둑은 산업화 시대엔 맞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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