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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영혼을 죽이는 병(病)-질투(嫉妬) 어떤 꽃도 뿌리까지 캐서 흔들어 보면 더러운 흙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엄상익(변호사)  |  2023-01-17
변호사로 사건을 처리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젊은 여성이 있었다. 날씬한 몸매에 청바지를 입고 야구 모자의 뒤로 낸 긴 머리가 아름다웠다. 그런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는 내면에서 타오르는 질투의 불에 활활 타서 재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수시로 연예인의 사이트에 댓글을 올렸다. 그러다가 그녀의 열등감이 건드려지면 분노가 폭발했다. 그녀는 밤도 낮도 잊은 채 악성 댓글을 써댔다. 살기까지 띤 지독한 시샘과 질투였다.
  
  장관 청문회를 보면 국회의원들이 먼저 돌을 들어 던지고 언론이 던지고 전 국민이 진창에서 허우적거리는 장관 후보자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같이 보이는 때가 있다. 겉으로는 인사 검증이라고 하지만 나는 질투의 폭력적인 악취를 느낀다.
  
  친하던 친구가 장관 후보자가 됐을 때였다. 장관 부인의 고등학교 성적증명서까지 제출하라고 하는 국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꽃도 뿌리까지 캐서 흔들어 보면 더러운 흙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덮고 넘어가야 할 부분도 있다. 그러나 세상 기준은 조화 같은 인간을 요구한다. 성적인 기준도 조선시대 사서삼경 속의 잣대를 들이대기도 한다. 위선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에서 잉태한 면이 있는 것 같다. 예부터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배고픔의 시대가 아니라 배 아픔의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배아픔의 고통이 더 심하다고 한다. 질투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다. 그 감정은 분노로 지속되면서 행복을 빼앗고 자신을 갉아먹을 수 있다. 고난은 외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내부에도 있다. 질투가 바로 내부에서 발생하는 근본적이고 큰 고난이 아닐까. 그것만 없다면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친구가 장관이 되자 은근히 질투도 났다. 그 질투의 색깔을 바꿀 방법을 생각해 봤다. 나는 친구에게 “질투도 나고 정말 부럽다”라고 드러냈다. 순간 질투의 감정이 증발하는 것 같았다. 부럽다는 표현을 상대방은 괜찮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친구가 잘되니까 나도 그 순간 장관급 변호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법무장교 시절 친했던 동기와 선배 몇 분과 단톡방을 개설해 소통하고 이따금씩 모여 같이 밥을 먹는다. 그들은 모두 군의 마지막을 장군으로 끝냈다. 나는 대위 때 제대했는데도 이상한 꿈을 꿀 때가 있었다. 꿈 속에서 그들은 모두 장군인데 나 혼자만 영원한 하급 장교였다. 내면에 질투가 있었나 보다. 장군 출신이고 국제형사재판관 출신 동기가 카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명절을 맞아 대통령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부럽다’고 카톡방에 썼다.
  
  군시절 심한 질투의 피해를 입어 보기도 했다. 장기장교로 입대한 후 사법고시에 합격한 몇 명의 군 동기가 있었다. 군의 상급자들은 못마땅해 했다. 어떤 협조도 해주지 않았다. 본질은 질투라고 본다. 동기생 한 명이 상관에게 양주를 한 병 선물했다. 그 며칠 후 상관은 전 장교들을 모아놓고 그 양주를 꺼내 보이면서 공개적으로 뇌물을 쓰는 놈이라고 망신을 주더라고 했다. 대법관을 거친 그 동기생은 지난 정권에서 대법원장이 되라는 요청을 받고 사양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신문에 검사 발령이 났는데 제대를 방해당해 일생이 꼬인 군 동기생도 있었다. 나의 경우도 상부에 불려가 평생 군복무를 하라는 각서를 강요받았었다. 왜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일생을 국방의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금전 관계나 여자관계에 대한 뒷조사를 받기도 했다. 나를 특히 질투하는 가까운 동기생에 의해서였다. 형사 입건이 되어 인생이 파괴될 뻔하기도 했다. 법무병과의 책임자인 장군이 자기도 고시에서 세 번이나 그의 합격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그때 나는 그의 내면에 응어리진 질투와 파괴 본능을 감지했다.
  
  성경을 보면 예수 죽음의 원인은 질투라고 되어 있다. 인간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는 병은 질투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그는 그의 길을 간다. 나는 나의 음악을 듣고 그는 그의 음악을 듣는다. 나에게는 나의 박자가 있고 그에게는 그가 발을 맞추는 박자가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그렇게 사는 게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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