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치 못 잡는다고 11살 아들 휴대전화로 내리친 아빠 집유》이는 어제 조선일보에 있던 한 기사 제목이다 내용은 별 것 없다 제목처럼 집에 여치가 들어왔는데 아버지가 아들에게 잡으라고 시켰지만 못 잡는 바람에 아버지가 화가 나서 제목처럼 해 버렸고 그래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나무랄 생각도 없고 아들을 다독일 생각도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어떨까 싶어서 댓글을 보니 하나같이 아버지를 비난해 놓았다 신문은 더 그랬다 과연 그래야 할 일일까?
우리 때에는 거의 다 이렇게 했지만, 나는 열 살이 되기 이전에 배가 고파서, 봄에는 농수로에 맨발로 들어가서 미꾸라지를 잡았고, 가을이면 논에 가서 메뚜기를 잡아서 구워 먹었다 여치 잡는 것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열 살이 되어서는 저 짓도 여럽아서 못했다(여럽다=나이가 많은 아이가 어린애 짓을 할 때에 쓰는 경상도 사투리) 열 살이 되면 내남없이 아이스케키통을 걸머져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별로 다르지 않다 현행법으로 13살이면 노동부장관의 허가를 얻어 노동에 종사할 수 있다 그러한데 11살이나 먹은 아이가(개정된 나이로 썼을 테니 실제는 나이가 더 많을 수 있다) 집에 들어온 여치 한 마리를 못 잡으니 아버지가 답답하기도 하고 성이 나기도 했을 것이다
신문은 “휴대폰으로 내리쳤다”고 썼는데 휴대폰으로 때렸다는 말보다 감정적이다 그리고 그의 전과까지 썼다 아들을 때렸다고 하여 아버지에게 전과가 있니 어쩌니 할 게 뭔가. 이 세상에서 전과를 말하는 데는 오로지 재판정뿐이다 어쨌든 휴대폰으로 때렸으니 그나마 잘한 일이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때릴 때 손이나 발로 직접 때리면 더 모욕적이다 이왕 때려야 한다면 손과 발이 아닌 다른 물건으로 때리는 게 낫다 그래서 들고 있던 휴대폰으로 때렸을 수 있다. 회초리를 들고 때렸으면 재판정에 가지 않아도 됐을 일을 휴대폰으로 때린 것이 잘못은 잘못이다
마침 중앙일보에《매번 '버럭' 뒤 자책하나요…양육자의 '화(火)' 집중해부》란 제목의 기사가 있고, 아이에게 ‘버럭’ 하지 않고 화를 잘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권수영 연세대 상담코칭학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아이에게 화내고, 후회하고, 돌아서서 또 화내는 양육자가 많습니다. 이때 ‘부족한 부모’라고 자책하지 마세요. 분노 뒤에 다른 감정이 숨어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화가 난 진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분노는 양육자의 탓이 아니다는 해설까지 실려있다.
또 중앙일보에《기질은 천성, 바꿀 수 없다 소심한 아이는 과보호 말라》라는 제목의 기사도 있다 거기에『성격의 발견』은 어떤 책인가? 라는 책 소개도 있다 그 중의 한 구절을 소개하겠다 “아무리 잘 보살펴도 통제가 되지 않는 아이들은 그렇게 타고났을 뿐, 양육자와의 애착이 불안정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이는 아이의 입장에서 설명한 글이다 뒤집어서 아버지의 입장에 대입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11살이나 된 아이가 여치 한 마리를 못 잡는 것도 통제되지 않는 아이의 행동일 것이다 여기서 아버지가 아들을 때린 일도 아들과의 애착이 불안정하기 때문인 것은 아닐 터이다” 그렇겠는데 아버지를 법정에 세운 아들과 세상은 뭐란 말인가?
성경도 이렇게 가르친다
매를 아끼는 이는 자식을 미워하는 자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벌로 다스린다
-잠언 13:24_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잠언 22:6-
아이를 훈육하는 데에 주저하지 마라. 매로 때려도 죽지는 않는다 아이를 매로 때리는 것은 그의 목숨을 저승에서 구해 내는 일이다 –잠언 23:13-
회초리와 꾸짖음은 지혜를 가져오지만 내버려진 아이는 제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 –잠언 29: 15-
자식을 징계하여라.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고 네 영혼에 기쁨을 가져다주리라. -잠언 29: 17-
잠언 한 권만 해도 자식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저렇게나 힘주어 일깨우고 있다 민주화 만능의 사회에서 가족 간에도 민주화가 된 나머지 아버지가 자식을 때렸다고 하여 세상이 난리를 친다 자식을 사랑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로 가르치는 곳은 대한민국 말고 어디 또 있겠나.
이미 40년 전쯤에도 교사를 하는 지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어릴 때는 누구나가 자기 아버지는 엄격하다고 가정통신문에 썼는데 요즘 아이는 하나같이 아버지가 민주적이다고 쓴다” 엄격하게 교육받은 자식 세대가 뒤에서 밀고, 엄격했던 아버지 세대가 이 나라를 건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