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9월 KBS에서 했다는 故 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자의 한 시간 남짓한 강연 동영상은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다. 원고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일생을 시간 순서로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감동적일 수가 없다. 꾸밈 없이, 군더더기 없이, 과장도 없이, 담담하게 드라마틱한 생애를 정리한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가장 세계적인 기업인 정주영의 인간적 면모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때로는 순박한 농사꾼처럼 느껴진다. 주요 부분을 뽑아서 정리한다. 먼저 고향과 부모에 대하여 이야기한 대목이다.
<부지런함으론 따라갈 자가 없었던 농사꾼 아버지, 그러나 가난이 역겨웠다.>
오늘 KBS에서 주어진 강연의 제목은 ‘한 기업인으로서의 경영철학’이라고 되어 있는데, 저에게 무슨 경영 철학이 학문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한 기업인으로 생각하는 바를 중심으로, 또 한 기업인의 성장 과정과 많은 체험에서 현재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계획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기업이 과거 조그마한 중소기업에서부터 중기업, 국내 대기업, 현재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커진 과정을 얘기하기 위해서, 먼저 어렸을 때부터 저의 어떤 성장 과정이 현재의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했느냐 하는 순서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다 농촌에서 가난하게 성장을 했습니다. 나는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라고 하는 한 50호 되는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1915년 겨울에, 시골 촌에서 7남매, 아들 여섯에 딸 하나 있는 7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 아버지 역시 7남매, 아들 여섯 딸 하나, 우리 고모가 한 분 계십니다. 아버지도 역시 우리 집안의 장손이고, 나도 또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는 어린 시절 서당에 한 3년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습니다. 천자문에서부터 결국은 소학, 논어, 맹자 이런 걸 배웠는데, 삼강오륜은 서당에서 어렸을 적에 여섯 살에서 아홉 살까지 3년간 배우고 또 소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서당에서 그 어려운 글을 배우고 매일 아침 선생님한테 외워서 책을 덮고 외워 바치고 또 외워 바치지 않으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고 했기 때문에, 굉장히 엄격히 배웠기 때문에 어렸을 때 배운 글은, 지금 학문을 생각하면 지금 대학에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치 경제 윤리 모든 걸 다 배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학교에 들어갔는데 사실 소학교에 들어가니까 배울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소학교에서 배운 것은 구구법하고 일본말 이런 것밖에 없고, 사실 배울 게 없어서 1학년 들어가서 다녔는데 1학년에서도 무슨 창가나 이런 거는 낙제점이지만 다른 것은 다 100점이고, 2학년 배울 게 없으니까 또 3학년 올라가라 그래서 3학년 올라가도 사실은 배울 게 없었습니다. 아주 실컷 놀고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절은 이 소학교 5년간이었습니다. 배울 게 없으니 아주 실컷 놀았던 겁니다. 그렇게 소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 동네에서는 아주 소문난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는데, 또 가난했기 때문에 이 농사를 짓는 데 아주 근검절약해서 여러 동생들을 건사했습니다. 농사를 지어가지고, 논에다가 보를 만들고 논을 일구고 또 화전을 일구고 해서, 그 많은 동생들을 장가보내고, 또 논을 만들고 밭을 만들고 해서 분가를 시키고 했는데,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참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부지런한 건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농촌에서 아버지께서는 내가 맏아들이니까 아주 가장 제일 부지런하고 우수한 농군을 만들기 위해 소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데리고 다니면서 농사를 시켰습니다. 우리 농촌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아침에 어두워서 집을 떠나 그 밭이나 논에 나가면 환하게 밝고, 밝자마자 그 일을 시작하고 이렇게 합니다.
그렇게 부지런하지 않으면 또 이렇게 살 수도 없고, 그렇게 부지런해도 또 흉년이 들면 아침에는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조반석죽(朝飯夕粥)’입니다. 근간에 모든 도시에 있는 사람들은 그 ‘조반석죽’이란 말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건 아침에는 밥을 해 먹어야지 점심을 안 먹으니까 밤에는 잘 테니까 죽을 쒀먹고 그냥 자면 또 되기 때문에, 농촌에서 대부분 흉년이 들거나 어려운 집에서는 대부분 겨울에 일 안할 적에는 그 ‘조반석죽’을 다 하는 겁니다.
제가 어렸을 적 지난 얘기를 하는 것은 이 KBS 시청자 중에 가난하고 어려운 그 젊은 사람들에게 다소 조금이라도 참고가 될까 해서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일제 하인데 일본 총독 통치하에는 우리 모든 농촌이 다 그랬습니다. 흉년이 들면 굶었지 총독부에서 무슨 대책을 해준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봄이 되면 초근목피 나무뿌리로,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고, 그리고 또 너무 어리고 잘 먹지를 못해서 황달병이 들고 또 부황(浮黃)이 나서 붓고, 또 거기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총독부 유도에 의해서 많은 사람들이 만주로 가고 북간도로 가고 이렇게 했습니다.
그 시골에서 저희가 농사를 짓고 가난하게 이렇게 크는데 어린 나이지만 너무 그것이 역겨웠습니다. 그래서 이 고생스러운 역겨운 그것을 어떻게 벗어날까 하는 것이, 어린 생각에도 절실히 느껴졌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은 ‘부모’>
우리같이 정상적인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 그 많은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생님은 ‘부모’다. 부모는 물론 학문적으로 조리있게 정리해서 가르칠 능력은 없지만, 부모의 정신과 행동은 자손에게 무한한 모든 가능성을 전달해주고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학교 선생들이 더 말할 나위 없이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에서 잘 선도하고 있지만, 아무리 훌룡한 은사라고 해도, 자기 부모처럼 깊은 애정을 가지고 지도하기는 어렵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체계 있게 지도를 안 하더라도, 모든 부모의 자식에 대한 깊은 애정은 자식에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심어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로부터 평생 무엇을 어떻게 하라거나, 무엇을 잘한다 하는 칭찬을 평생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농촌에서 소학교 졸업하고 농사일을 하는데 일하기 싫어하다 매나 맞고 그랬지, 한번도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다시 없을 훌륭한 농군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그 생각과 마음을, 우리는 어리지만 다 읽을 수 있었다 이겁니다.
어머니께서는 글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당시 부인들은 여간한 도시 양반집, 서울의 명문대가 아니고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거나 하지 못했는데, 시골 농촌 어머니이기 때문에 글은 한 자도 배운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하는 것, 모든 자기 자식들을 위해서, 대자연, 이를테면 큰 바위를 봐도 높은 산을 봐도 큰 나무를 봐도 깊은 물을 봐도, 그 자손들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비는 그 마음은 아무도 당할 수가 없는 것이죠. 마음 속으로, 길을 가면서도, 자나깨나 자식을 위해 비는 마음, 그것이 자식들한테 전부 마음속에 흘러내리게 했기 때문에,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저에게 안겨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해나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모든 것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느 미국의 정형외과 선생님의 얘기가 어떤 사람이 자기를 찾아와서 국회의원 선거를 나가서 자꾸 떨어지는데 자기 코가 다른 사람처럼 높지 못하기 때문에 떨어진다고 그래서 수술을 해줬더니 그 다음 나가서 당선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코가 낮기 때문에 안 될 거라는 그 생각이 크게 위축감으로 작용해서 장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들, 선천적인 불구자가 아닌 모든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다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많은 일을 하는데 골치가 아프고 어떻게 건강을 유지하냐’고 하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거나 현재나, 제가 불행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언제든지 미래를 향해서 항상 희망에 차있기 때문에, 또 자기가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꼭 좋은 날이 올 거라는 그런 희망에 차있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매일 아침, ‘소풍가는 날’의 벅찬 기대와 흥분 속에서 일어난다>
과거 가난해서 노동판에서 일을 할 때에도 아침 6시에는 모두 아침 일찍 나가니까 그땐 일을 위해서 그렇게 했지만, 오늘날까지도 아침에는 언제든지 그날 할 일이 아주 기쁘고 즐거워서 흥분 속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쭉 아침 5시 전에는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일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날 할 일이 너무 기대되고 기뻐서.
어떤 사람들은 골치 아픈 일이 많지 않느냐고 묻는데, 저는 좋은 일이 있어서 좋은 일을 더 잘되게 밀고 나갈 때에는 물론 한없이 좋지만, 또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그 기쁨은 다시 없이 좋습니다.
시골에서 일본 경찰에 독서회 문제로 늘 불려 다니는 동네 사람 얘기를 들은 게 있습니다. 매일 독서회 사건으로 불려 들어갔는데, 그 사람 얘기가 “경찰서에 불려 들어가는 것은 골치 아프지만, 그 나오는 기분이 좋아서 살 맛이 있다”고. 어려운 일을 해결할 때의 그 기쁨은 좋은 일이 추진될 때의 기쁨 못지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을 흥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학교 학생들이 소풍 갈 때 흥분 속에서 일찍 일어나는 기분과 같이,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부모님 덕분에 선천적으로 건강한 면도 있지만, 전 모든 사람들이 ‘정신이 건강하면 육체는 항상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실의에 차있고 복잡하고 알력이 있고 이렇다면 건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신이 성실하고 건전하면, 육체는 항상 건강하고 건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특별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되도록 회사에 걸어나오고, 어쩔 때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 6시쯤부터 정구도 치고. 그러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회사 아침 간부회의를 7시 반부터 하는데 아직 시간이 남으니까 자연히 걸어 나오면서 시간을 소비하든지 정구하면서 소비하든지 매일 일과같이 그렇게 합니다. 생각만 건전하게 가지고 부지런하면 다 자기가 뜻하는 대로 성공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