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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끝까지 들어주는 게 판사의 역할 아닐까요?" 엄상익(변호사)  |  2023-03-25
<두 판사의 재판 스타일>
  
  대기석에서 기다리던 변호사들이 순차로 변호인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 사십대쯤의 변호사가 재판장을 보고 말했다.
  
  “증인을 신청하겠습니다.”
  “기각합니다. 증인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재판장이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번 변호사가 그 자리에서 다시 말했다.
  
  “증인을 신청하겠습니다.”
  “기각합니다.”
  
  “입증을 하기 위해 증인을 신청하는 겁니다.”
  “그래도 기각합니다.”
  
  재판장은 바위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의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수재형의 판사였다. 모범생이 예습을 하는 것 같이 그는 미리 재판 기록을 꼼꼼히 읽어본 것 같았다. 툭툭 던지는 말 속에서 그걸 알 수 있었다. 사건을 다 파악하고 있어서 그런지 변호사들이 하는 증인 신청이 필요없다고 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공연히 재판만 지연된다는 의식인 것 같았다. 재판을 받는 피고인 한 명이 자기가 쓴 두툼한 자료들을 판사에게 내놓았다. 재판장이 그걸 힐끗 보면서 말했다.
  
  “이거 읽지 않겠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 재판은 요식절차 정도라 하는 느낌이 들었다. 상당수의 판사들이 재판하는 걸 보면서 우수한 학생이 수학문제를 푸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건 기록은 시험문제이고 판결은 그 답안지인 것 같았다. 자기가 푸는 공식 이외에는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 인간의 애환과 고통이 그렇게 수학문제 풀듯 해결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윽고 내가 변호할 차례가 됐다. 나는 강한 어조로 증인을 신청하겠다고 했다.
  
  “이미 자료가 있는데 증인이 필요할까요?”
  “그건 검사의 유죄 입증의 자료지 변호사의 무죄 주장 자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판사는 검사와 변호사 양쪽에 공평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재판부가 바쁘니까 진술서로 대신 하시죠.”
  “재판장님께 묻겠습니다. 진술서의 글 몇 줄 읽는 걸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 진실을 파악하실 수 있습니까? 상황에 따라서 증인의 눈빛이나 표정과 태도가 더 많은 걸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정 그러시면 증인을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마지못해 증인 신청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판사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건을 처리하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의사가 한 환자에게 몇분을 쓸 수 없는 것 같이 말이다.
  
  그런데 그 반대의 상황도 목격한 적이 있다. 누가 봐도 뻔한 절도 사건의 재판 현장이었다.
  
  “저는 술에 만취되어 친구집인 줄 알고 물을 먹으려고 그 집에 들어갔습니다. 도둑질하러 들어간 게 아닙니다.”
  
  절도죄 피고인의 항변이었다. 그 말을 들은 재판장이 말했다.
  
  “기록을 보면 그 집 주인이나 세 들어 사는 할머니가 모두 물건을 훔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경찰과 검찰에서 이미 진술을 했는데 법정에까지 불러 이중삼중으로 힘들게 해야 할까요?”
  
  내가 봐도 뻔한 사건이었다. 피해자와 목격자의 진술이 있고 훔친 물건이 증거로 제출되어 있었다.
  
  “재판장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도둑질하는 걸 봤다는 그 할머니와 집주인을 증인으로 불러주세요. 저의 결백에 대해 말해 줄 겁니다.”
  
  재판장은 그가 원하는 대로 증인신문 기일을 잡아 주었다. 그 다음 재판에서 재판장이 불려온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저 사람이 도둑질하는 걸 봤어요?”
  “봤죠.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다가 저 사람이 안방에서 도둑질하는 걸 봤어요. 너무 겁이 나서 못 들어갔어요. 험한 세상에 다칠까 봐요. 그때 주인아저씨가 들어오더라구요. 그래서 소리치고 같이 저 사람을 잡게 된 거예요.”
  
  다음에는 그를 잡았다는 피해자인 집주인이 증인석에 올랐다. 재판장이 피고인인 그를 보고 말했다.
  
  “피고인, 저 증인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피고인인 그가 집주인을 보면서 말했다.
  
  “아저씨 제가 집 앞에서 봤을 때 물건을 다 돌려드리고 제 주민등록증까지 맡겼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제가 도둑놈이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게 맡긴 겁니까? 나한테 뺏긴 거죠. 그날 내가 댁을 경찰서에 신고하려고 할 때 하도 사정을 하니까 내가 일단 주민등록증을 맡아두고 당신을 보내줬는데 그 후 연락이 없어서 경찰서에 신고한 거 아니예요?”
  “아저씨 그날 내가 무릎 꿇고 빌었잖아요? 그러면 된 거지 왜 신고해서 나를 이렇게 고생시킵니까?”
  
  도둑들의 심리가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재판장이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피고인에게 말했다.
  
  “빌었다면서?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은 사람이 왜 빌었지? 또 술에 취해서 그 집으로 들어가 정신 없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을 하지? 이쯤 해서 재판을 끝내도 되겠죠?”
  
  재판장은 점심도 먹지 못하고 밤 열시까지 눈이 새빨갛게 충혈이 된 채 재판을 계속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판사실에서 그와 만나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제가 변호사를 하다가 판사가 됐는데 변호사를 할 때 답답했던 건 재판장들이 내가 다 안다는 식으로 대하면서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었죠. 하기야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보다 어려운 건 없지만 말이예요. 그래서 내가 재판장이 된 이후에는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말이라도 또 눈에 보이는 거짓말이 있더라도 가급적이면 다 들어주려고 합니다. 말을 끝까지 들어주는 게 판사의 역할 아닐까요? 판사라는 직업 이거 직업적 사명감이 없으면 못 해낼 것 같아요.”
  
  성경 속의 명 재판관 솔로몬은 하나님에게 남의 말을 잘 듣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국민들이 필요한 건 잘 듣고 현명하게 판단해 주는 판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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