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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중국 廣西省에도 ‘大百濟’가 있다 현지인 壯族은 百濟墟(백제허)를 ‘대백제’로 발음 趙南俊 전 월간조선 이사  |  2023-09-30
10월9일까지 열리는 ‘대백제전’ 기념, 마지막 글입니다.
  중국에 ‘대백제’라는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면 믿어지십니까? 蘇鎭轍(소진철) 전 원광대 교수(전 외무부 본부대사)가 쓴 ‘백제 무령왕의 세계’라는 책에 본인이 직접 그곳을 답사한 내용이 나옵니다.
  廣西省(광서성) 壯族(장족)자치구 邕寧縣(옹녕현) 百濟鄕(백제향·鄕은 한국의 面에 해당) 부근에 인구 1300여 명이 사는 百濟墟(백제허)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백제의 옛터’라는 의미의 ‘百濟墟’를 그 곳 원주민인 壯族들은 중국 발음 ‘바이지쉐’라고 읽지 않고, 전혀 다른 「대백제(Daejbakcae·대이백채 ※북경어에는 ㄱ과 ㅋ 발음이 없지만, 광동어에는 있음)」라고 한국 식으로 읽는다는 점입니다. 중국은 百濟의 흔적만 있다는 뜻으로 ‘百濟墟’라고 했지만, 壯族들은 조상 대대로 불러온 그대로 「대백제」라는 지명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반도에서 수천km 떨어진 이 곳에 웬 ‘백제’일까요.
  
  이와 관련, 百濟 멸망기의 인물 黑齒常之(흑치상지·630~689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볼까 합니다. 廣西省의 百濟墟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열전 黑齒常之傳에 그는 百濟가 나당연합군에게 항복한 이후, 任存城(임존성)에 3만의 군사를 모아 당군과 싸워 큰 피해를 입혔다고 나옵니다. 후에 그는 당에 항복하여 燕國公(연국공), 燕然道大總官(연연도대총관)의 지위에까지 올랐습니다. 대총관은 지금 우리나라의 군사령관(=大將) 급에 해당합니다. 그의 아들 黑齒俊(흑치준· 676~706년)의 묘지석이 1929년 낙양 북망산에서 발굴됐고, 1986년 중국학자 李希泌(이희필)이 그의 저서 《曲石精盧藏唐墓誌(곡석정로장당묘지)》에 그 탁본을 소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묘지석은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명문이 모두 판독 가능하다고 합니다. 黑齒俊의 묘지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府君諱常之字桓元百濟人也其先出自扶餘氏封於黑齒子孫因以爲氏焉其家世相承爲達率曾祖諱文大祖諱德顯考諱沙次竝官至達率 (부군휘상지 자환원 백제인야. 기선출자부여씨 봉어흑치 자손인이위씨언. 기가세상승위달솔 증조휘문대 조휘덕현 고휘사차 병관지달솔·부군(=아버지)의 이름은 상지요, 자는 환원으로 백제인이다. 그 선조는 본래 (王姓인) 부여씨로서 흑치(국)에 봉해졌다. 자손들이 흑치라는 성씨를 쓰게 된 연원이다. 그 가문은 대대로 (백제국 제2관등인) 달솔을 세습했다. (아버지의)증조는 이름이 문대, 조부는 덕현, 부는 사차로서 모두 달솔 관등이었다.)〉
  
  黑齒常之의 증조부 문대는 달솔(백제 16관등 중 두 번째)로서 흑치국에 봉해졌던 것입니다. 그들은 중국 梁나라의 ‘職貢圖(직공도)’에 서술된 것처럼, “왕의 자제 宗族(종족)으로서 봉한다”는 22개 담로 중 하나인 흑치국을 분봉받았고, 그의 자손들은 대대로 그 지위를 계승했습니다. 그래서 성씨도 부여씨에서 흑치씨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흑치라는 이름은 주민들이 치아를 호보하기 위해 ‘틸랑’이라는 열매를 씹은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위치는 지금의 중국 남부 廣西省 邕寧縣 百濟鄕이라고 합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70~80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이빨이 검은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98년 中國에서 출간된 《中國將帥全傳(중국장수전전)》에 따르면 〈黑齒常之唐高宗李治則天后時名將百濟西部(今廣東欽縣西北)人(흑치상지당고종이치측천후시명장백제서부(금광동흠현서북)인)·흑치상지는 당나라 고종 이치와 측천무후 시대의 명장으로 백제 서부(지금의 광동성 흠현 서북)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百濟 서부는 한반도의 서부가 아니라, 한반도 바다 건너 서쪽(중국의 남서부)이라고 中國人 학자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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