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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행이야기
비스마르크의 언론공작에 넘어간 나폴레옹 3세 프랑스와 독일의 복수전 시리즈 趙甲濟  |  2024-01-02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복수전 시리즈
  
  
   1870년 초, 독일의 프러시아 王家(왕가,호헨쫄렌)에 속한 레오폴드 王子(왕자)는 혁명으로 공석이 된 스페인 왕위의 계승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국은 舊敎(구교)국가인 스페인과 新敎(신교)국가인 프러시아의 연대를 걱정하여 레오폴드의 王位(왕위) 계승에 반대하였다. 필요할 경우 전쟁도 불사한다는 암시까지 주었다. 7월 레오폴드는 왕위 계승 의지를 포기하였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이끌던 프러시아 정부의 외교적 패배로 비쳐졌다.
  
   프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過慾(과욕)을 부린다. 프러시아 왕가의 굴복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스 외무장관(Duc de Gramont)은, 駐(주)프러시아 프랑스 대사(빈센트 베네데티)에게, '다시는 우리 집안에서 스페인 왕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프러시아 왕으로부터 받아내라는 훈령을 보냈다. 7월13일, 프러시아의 빌헤름 1세는 휴양중이던 엠스에서 산보를 하고 있었다. 프랑스 대사가 접근하여 본국의 메시지를 구두로 전했다. 빌헤름 1세는 정중하게 대사의 제안을 거절했고, 두 사람은 다소 냉랭하게 헤어졌다.
  
   왕의 비서가 두 사람의 대화를 적어 베를린의 비스마르크 수반에게 알렸다. 이는 '엠스 전보'라고 유명해진다. 비서가 작성한 보고문은 이러했다.
  
   <국왕 폐하께서 이렇게 써 주셨습니다. "베네데티 백작이 산책로에서 짐을 가로막더니 성가시게 하는 태도로, '짐은 호엔쫄렌 家門(가문) 왕자의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해 다시는 동의하지 않을 것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본국에 전보로 보내도록 윤허해 달라고 요구했음. 그런 식의 약속은 옳지도 가능하지도 않은 만큼, 이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였음. 물론 짐은 그에게 '짐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고, 짐보다 당신이 파리나 마드리드를 통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우리 정부가 그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틀림없이 알 것'이라고 말했음.
  
   (장관 중 한 명의 조언을 받으신) 국왕 폐하는 상기 요구사항에 대해 더 이상 베네데티 백작을 만나시지 않겠다 하시고, 이 문제에 대해 백작이 이미 파리로부터 전달받은 것과 같은 내용을 폐하께서 (레오폴드로부터) 확인받으셨으니 대사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고 부관(adjutant)을 통해 전달하도록 명하셨음. 폐하는 각하(비스마르크)께서 이번 베네데티 백작의 새로운 요구사항과 이를 거절한 사정을 우리 대사들과 언론에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음.>
  
   비스마르크는 이 電文(전문)을 약간 편집, 언론에 공개했는데, 큰 왜곡은 아니었다.
  
   <스페인 왕국 정부가 프랑스 제국 정부에 호헨쫄렌의 왕자가 (왕위 계승을) 포기하였다는 통보를 했다는 뉴스가 나온 후, 프랑스 대사는 (빌헤름 1세) 폐하께서, 앞으로 영원히, 호헨쫄렌 家門 사람이 스페인 왕의 후보가 되려고 한다면 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는 전보를 파리로 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폐하는 이에 대사를 재차 접견하는 것을 거부하고, 副官을 통하여 더 할 말이 없다는 뜻을 대사에게 전했다.>
  
   프랑스 통신사 아바(Havas)는 비스마르크의 발표문을 번역하면서 중요한 왜곡을 했다. 통신은 대사의 다소 무례한 요구를 '질문'이라고 오역했다. 부관(adjutant)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쓰는 바람에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프랑스에서 adjutant는 하사관이지만 독일에선 고급 장교이다. 시종무관으로도 불린다. 통신사의 왜곡이 프랑스의 많은 신문에 실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빌헤름1세가 프랑스 대사와 조국을 모욕했다고 흥분하게 되었다. 이 보도가 나온 날은 하필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14일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프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런 反프러시아 정서는 언론을 통하여 베를린으로 전달되어 이번엔 프러시아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스마르크가 노린 바였다.
  
   그는 독일통일을 완수하기 위하여는 반드시 프랑스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판단,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대중영합적인 나폴레옹 3세, 언론의 왜곡 선동, 이성을 잃은 군중의 흥분이 내심 전쟁을 바라던 비스마르크에 걸려 든 것이다. 프랑스가 먼저 전쟁을 걸어오니 프러시아로서는 피해자 입장에서 외교적 대응을 하기가 쉬웠다. 나폴레옹 3세는 군사적 승리를 확신하였을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영국도 프랑스 편을 들어줄 것이라고 오판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전쟁 개시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 여론이 들끓으니 할 수 없이 7월19일 프러시아에 선전 포고하였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4000만 명을 육박했지만 프러시아는 2400만 정도였다. 다수 유럽 나라들도 프랑스의 승리를 점쳤다.
  
   프랑스 아르덴느 지방의 세단. 1870년 9월1일, 이곳에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군대 10만 명이 프러시아의 참모총장 大몰트케 장군이 이끄는 20만 대군에 포위당하였다가 항복했다. 普佛(보불)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한 프러시아는 독일의 수십 개 연방국가를 통합하여 통일독일제국을 건설한다.
  
   세단에서 프랑스군 사령관은 항복 교섭을 하면서 비스마르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軍이 명예롭게 항복하도록 해주시오. 우리는 무기를 갖고 편제를 갖추어 퇴각하고, 다시는 프러시아 군대와 싸우지 않겠소. 이렇게 해야만 장차 우리 두 나라 사이에는 원한과 복수전이 없을 것이오.』
  
   비스마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아는가. 프랑스는 지난 2세기 동안 우리 독일을 서른 번이나 침략하였다는 것을.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점령하기 위하여 이 전쟁을 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민족이 통일국가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부 독일의 작은 나라들이 프랑스의 영향권에서 독립하여, 독일帝國(제국)에 편입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를 꺾어야 수백년 동안 독일민족이 당했던 피해에 대해 복수를 하면서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고 프랑스에 대한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비스마르크는 普佛전쟁을 역사적인 복수전으로 이해한 측면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고 있는 기간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러시아 王 빌헤름1세를 독일帝國의 황제로 추대하는 대관식을 거행했다. 독일민족으로서는 통쾌한 복수의 상징적 행사였지만 프랑스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1870년 프러시아가 普佛전쟁에서 이기고 그 이듬해 프랑크푸르트 조약을 통해서 알자스와 동부 로렌 지방을 프랑스로부터 빼앗아 간 것은 크나큰 후유증을 남겼다. 알자스는 주민이 원래 독일 사람들이었지만 로렌은 프랑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자존심이 상한 프랑스는 그 뒤 사사건건 독일과 敵對(적대) 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독일과 대항하려는 유럽의 모든 국가는 일단 프랑스와 손잡으려고 했다. 프랑스-독일의 리턴 매치는 불가피하게 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불씨는 알자스 합병에서 이미 예비된 셈이다.
  
   普佛전쟁은 유럽 및 세계사의 흐름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유럽의 패권국가이던 프랑스를 꺾음으로써 독일이 유럽의 주도권을 쥐면서 「팍스 브리타니카(大英帝國의 패권下 평화)」 질서에 도전하게 되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프랑스를 견제하면서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펴왔다. 유럽의 세력 추가 독일 쪽으로 기울게 되자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고 독일을 견제하는 방향으로 외교 전략을 선회한다. 제1, 2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와 영국이 연합군이 되어 독일에 대항한 것은 普佛전쟁의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이 육상의 패권을, 영국이 해상의 패권을 쥐게 됨에 따라 세계 시장에서 두 나라가 각축하게 되었다. 이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兩國(양국)은 국방력, 특히 해군력 증강을 도모하게 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군사력 강화 경쟁에 뛰어들었다.
  
   普佛전쟁은 전략 전술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병보다 포병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병력을 동원하고 집중시키는 데 철도망의 중요성이 입증되었다.
  
   ▲프러시아 군대의 참모조직이 세계 군사조직의 모델이 되었다.
  
   ▲과학기술력과 士氣(사기)가 승리의 요인이었다. 즉 이기겠다는 의지와 수단이 승리의 어머니란 사실이 이 전쟁으로 새삼 정리된 것이다.
  
   普佛전쟁에서 진 프랑스는 그 뒤 44년간 와신상담하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1914년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뒤 벨기에를 침공하여 거대한 우회전으로 파리를 향해서 진격할 때 프랑스 사령관 조프레는 이 예봉을 파리 근교 마른느에서 꺾었다. 마른느에서 진격이 저지된 독일군은 속전속결의 승리를 포기해야 했다.
  
   그 뒤 독일군대와 프랑스-영국 군대는 서부 전선에서 참호전, 독가스전을 계속하면서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죽어갔다. 마른느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꾼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베르당 전투나 솜느 전투가 더 대규모였지만 전략적 의미는 마른느 전투가 더 무겁다).
   이 마른느 전투를 총지휘한 독일의 참모총장은 小몰트케라고 불리는 사람으로서 普佛 전쟁 세단 전투의 승리자 大몰트케의 조카였다. 마른느 패전의 충격으로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한 小몰트케는 2년 뒤 병사하였다. 프랑스로서는 몰트케 집안에 대한 복수도 한 셈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에 나이 20~32세 사이의 프랑스 젊은이들(남자) 중 半(반)이 전사했다. 140만 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이 유럽전쟁에서 죽었다.
  
   1916년 2월 독일軍은 베르당 요새를 수십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한다. 목표는 점령이 아니라 섬멸이었다. 독일은 프랑스軍을 이 결전장으로 끌어들여 5(프랑스)대 2(독일)의 비율로 죽임으로써 병력의 원천을 고갈시키겠다는 전략목표를 두고 있었다. 페탕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軍은 영웅적인 방어전을 펼쳐 獨佛(독불) 양쪽의 사상자가 비슷해졌다. 근 10개월을 끈 이 전투에서 쌍방 합쳐서 약 80만 명이 戰死傷(전사상)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主전장은 라인강 연변 서부전선(독일 측에서 보았을 때)이었다. 대포, 기관총, 참호, 나중엔 비행기와 탱크도 등장한 총력전이었다. 그 전의 전쟁은 결전을 몇 번 하면 어느 나라의 승리로 끝났지만 제1차 세계대전부터는 그 나라의 국력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하는 총력 소모전이 되었다.
  
   마지노 요새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너무나 많은 人命(인명)손실을 기록한 프랑스가 그런 희생을 되풀이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만든 지하요새였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선을 따라 10년간 건설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이 요새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1940년 5월 독일군이 마지노 요새를 우회하여 벨기에를 거쳐 프랑스 대군의 옆구리를 강타하여 기절시켜버린 바람에 요새를 써먹지 못한 것이다.
  
   이때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아르덴느 돌파작전을 감행했다. 아르덴느는 벨기에의 숲지대인데 탱크부대가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 프랑스의 판단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아르덴느 숲의 前方(전방)에는 아주 미약한 방어선을 폈고, 벨기에 북부전선에 主力(주력)을 배치했다. 독일군은 벨기에 북부전선을 主攻(주공)으로 하는 것처럼 페인팅 묘션을 취했다.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은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작전을 또 쓴다고 판단하여 주력군을 벨기에 쪽으로 北進(북진)시켰다.
  
   이 틈을 탄 독일군은 기갑군단을 핵으로 한 주력군으로 아르덴느 숲지대를 지난 뒤 프랑스의 약한 방어선을 돌파하여 프랑스 주력군의 배후로 나왔다. 롬멜, 구데리안 등 맹장들이 지휘하는 전차부대는 무인지경을 가듯이 쾌속 진격을 하여 도버해협까지 나가 프랑스 주력군과 파리 방어군을 兩斷(양단)하고 주력군을 북쪽에 고립시켰다. 프랑스는 6주 만에 붕괴되었다.
  
   히틀러는 1914년 마른느 패전의 복수를 한 것이다.
  
   베르당 승리의 영웅이었던 프랑스의 페탕 원수는 프랑스를 점령한 히틀러와 협력하여 프랑스 남부에 비시 정부를 만들어 나치에 협력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드골이 한때의 상관이던 그를 종신형으로 감형시켰다.
  
   엠스 전보 사건은 언론에 의하여 선동된 여론을 따라가는 외교는 亡國(망국)의 길임을 가르친다. 한국언론의 감정적 反日(반일)보도, 사대주의적 親中(친중)보도를 따라가는 이 정부는 親中反日 노선을 거의 공식화했다. 이게 親中反美 노선으로 돌변하는 날 한국은 동북아의 외톨이가 되어 중국과 북한, 그리고 국내 從中(종중)세력의 연합전선에 농락당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악화되도록 하는 데는 兩國 언론의 경쟁적 反日-反韓 보도가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일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좋아할 나라는 중국과 북한이고, 걱정하는 나라는 미국이다. 한국의 보수층 안에서도 무조건적 反日운동에 휩쓸려 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 普佛전쟁 직전 비스마르크의 냉정한 전략에 놀아났던 프랑스 사람들의 격정적 反프러시아 감정이 결국은 재앙을 自招(자초)한 사실에서 배우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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