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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행이야기
한국인들이 잘 가지 않는, 샬레마뉴가 묻힌 아헨 성당 趙甲濟  |  2024-01-02

  
  아헨(Aachen)은 독일의 서쪽 끝에 있으면서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경한 도시이다. 인구는 약 25만 명이다. 아헨 工大는 학생이 약 3만 명이다. 다른 대학까지 합치면 이 도시에 약 5만 명이 학생이다. 작은 도시이지만 역사와 문화의 무게는 엄청 크다. 아헨은 독일사람들에겐 정신적 고향이 되는 몇 도시 중 하나이다. 이 도시의 역사적인 意義(의의)는 프랑크 왕국의 왕 샬레마뉴(大帝라는 뜻이 포함됨)에서 온다. 샬레마뉴는 여러 표기법이 있다. 라틴어로는 Carolus Magnus, 프랑스어로는 Charlemagne, 독일어는 Karl de Grosse, 스페인어로는 Carlomagno, 후대에 영어로는 Charles the Great. 서기 768년에 왕이 되어 서기 814년에 죽었고, 아헨 성당에 묻혔다.
  
  이 기간 그는 지금의 프랑스, 베네룩스 3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의 서쪽, 이탈리아 북쪽을 통일했다. 프랑크 왕국이라 불렸다. 西로마가 망한 5세기 이후 처음으로 통일제국이 西유럽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손자代에 와서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지만 통일된 유럽의 꿈을 심어준 사람이다.
  
  10여 년 전 유럽공동체(EU)가 유로라는 공통적인 통화를 쓰고 출입국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한 이후 샬레마뉴 大帝는 유럽공동체의 이상을 맨 처음 구현했던 인물로 재평가 받는다. 아헨市는 샬레마뉴 賞(상)을 만들어 유럽통합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준다. 지스카르 데스탱 전 프랑스 대통령, 지금은 故人(고인)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이 이 상을 받았다.
  
  아헨이란 말의 語源(어원)은 라틴어의 Aquis로서 물, 목욕이라는 뜻이다. 로마가 이곳을 지배할 때 온천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수온이 섭씨 70도를 넘는다. 로마 사람들은 목욕을 즐겼다. 독일인들도 그러하다. 1981년에 서울 올림픽을 결정했던 독일 남부의 바덴바덴이 대표적인 溫泉鄕(온천향)이다. 샬레마뉴 大帝도 목욕을 좋아했다. 그는 주로 겨울에 아헨에 머물기 시작했다. 자연히 궁정 건물이 들어서고 首都(수도)처럼 되었다.
  
  샬레마뉴가 성당의 건축을 명령한 것은 서기 792년이다. 805년에 성당 건물이 거의 완성되어 로마교황 레오3세에 의해서 聖母(성모) 마리아에게 獻堂(헌당)되었다.
  이 성당은 둥근 천장 위에 돔 같은 8각형의 둥근 지붕이 솟아 있다. 알프스 북쪽에서는 수백년 동안 이 성당이 가장 컸다고 한다. 천장과 지붕은 벽돌로 되어 있다. 천장과 지붕이 벽에 너무 무거운 힘을 주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 안에 쇠로 만든 일종의 닻을 여러 개 달아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식을 도입했다.
  
  샬레마뉴는 서기 800년에 로마로 가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西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5세기에 서로마가 망한 이후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쓰여졌다(샬레마뉴는 그런 호칭을 쓰지 않았으나 그는 나중에 나타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로 간주된다). 힘이 빠진 교황은 샬레마뉴에게 황제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지금의 터키 수도 이스탄불은 당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면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어 있었다. 기독교계가 동서로 분열되어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독일어로 황제의 성당(Kaiserdom)이라고 불리는 아헨 성당은 크기도 하지만 오래된 멋과 권위가 넘친다. 유럽에서 서기 800년 전후하여 만들어진 성당, 시청 같은 건축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기는 암흑기로 불리던 中世(중세)였다.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야만의 게르만족은 곧 기독교인이 되지만 로마의 문명은 잊어버렸다. 로마가 자랑하던 토목 건축 기술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5~11세기의 중세 건축물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스페인을 점령한 아랍인들이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빌리아, 톨레도 등지에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을 뿐이다.
  
  때는 전쟁과 파괴의 시절이었다. 이 시절, 기독교 신부들과 유태인들이 겨우 글을 알고 그리스-로마 문명의 불씨를 지켜갔다.
  
  아헨 성당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강력한 王權(왕권)이 뒷받침하니 로마의 전통을 이은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샬레마뉴 大帝는 정복사업을 펴면서도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특히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중세 유럽에는 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서기 936년부터 1531년까지 이 성당은 30명의 독일 왕과 12명의 왕비가 대관식을 올리는 聖地(성지)가 되었다. 독일왕은 神聖(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국가였다. 여러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황제 겸 독일 왕을 뽑았다.
  
  샬레마뉴는 서기 814년에 죽자 이 성당에 묻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3세는 서기 1000년에 샬레마뉴의 棺(관)을 열게 했다. 그때까지도 大帝의 屍身(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오토 3세는 샬레마뉴의 이빨 하나를 뽑아 내고 棺을 다시 닫았다. 샬레마뉴의 蔭德(음덕)을 보려는 생각이었다. 1165년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 1세가 샬레마뉴의 시신을 발굴하여 그를 聖人으로 만들고 새로운 관으로 옮겼다. 샬레마뉴의 聖殿(성전)으로 불리는 이 관은 1215년에 완성되었다. 호화를 극한 금세공으로 만든 집 모양의 관이 이 성당 안에 있다.
  
  聖人으로 만들 권한은 교황만이 가졌다. 바바로사 황제는 교황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다. 오로지 권력의 힘으로 교황청의 公認(공인) 없이 샬레마뉴를 聖人으로 조작한 셈이다. 棺의 표면에는 예수, 교황, 제자, 샬레마뉴, 聖母 마리아 등이 새겨져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그린 구도가 아니라 샬레마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아헨 성당은 중세에 중부 유럽의 가장 중요한 巡禮聖地(순례성지)가 되었다. 1496년에 약 14만 명이 이 성당을 다녀갔다. 나치 시절이던 1937년에도 약 80만 명이 참배했다. 특히 헝가리 사람들이 많이 참배한다. 샬레마뉴가 지었던 궁정터에는 지금 14세기에 세운 아름다운 市廳舍(시청사)가 있다. 아헨 성당의 보물은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것으로 꼽힌다. 여기서 대관식을 올린 황제들이 선물을 많이 한 덕분이다. 1349년 이후 7년에 한번씩 공개하는 4대 보물이 유명하다.
  성모 마리아의 외투, 세례요한의 옷, 아기 예수의 襁褓(강보)와 허리를 두르는 옷. 과연 眞品인가 하는 의문을 굳이 가질 필요가 있을까? 종교로 과학을 부정하고 과학으로 종교를 해체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슬기로운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197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제도를 만들었을 때 맨 처음 12개를 지정했다. 3개가 유럽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헨 성당이었다. 게르만족의 정신, 神聖로마제국의 권위, 유럽공동체의 이상이 스며 있는 건물이란 점에서 특별히 優待(우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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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 대제가 지금 독일의 아헨을 수도로 정한 뒤인 서기 800년 크리스마스 날 그는 로마에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황제로 대관(戴冠)되었다. 그때 레오3세는 샬레마뉴를 '아우구스투스, 하느님으로부터 관을 받은, 로마의 위대한 평화 황제'라고 불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처음으로 유럽에 황제가 등장한 셈이다. 샬레마뉴 대제는 이슬람 세력의 정복하에 들어갔던 이베리아 반도를 제외하면 지금의 유럽의 거의 전부(프랑스, 독일, 北유럽, 네덜란드, 헝가리, 폴란드, 체코)를 통일했던 것이다. 당시 남부 유럽은 콘스탄티노풀을 수도로 삼고 있던 동로마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샬레마뉴 대제의 할아버지인 샤를르 마르텔, 아버지 페핀은 스페인을 점령한 이슬람 군대가 프랑스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여 서유럽의 심장부를 기독교의 본부로 지켜냈다. 이어서 샬레마뉴 대제는 독일의 게르만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샬레마뉴의 프랑크 왕국은 그의 死後에 분열되었지만 지금의 유럽 기독교 문명 국가들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유럽 기독교 문화의 수호자이자 확산자가 되었던 샬레마뉴 대제는 EU(유럽공동체)가 설립된 이후 재조명되었다. 유럽의 통합을 꿈꾸었던 인물들을 찾아올라가면 히틀러와 나폴레옹, 그리고 샬레마뉴 세 사람을 만난다. 가장 오랫동안 유럽의 거의 전체를 통치했던 이가 샬레마뉴였고, 그는 자살한 히틀러나 귀양간 나폴레옹에 비교하여 가장 성공적이기도 했다. 지금의 EU 판도도 프랑크 왕국의 영토와 상당히 겹친다.
   이렇게 되면서 프랑크 왕국의 수도인 아헨이 EU의 상징적 도시로 부각되었다. 아헨은 지금도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의 국경선이 모이는 곳으로 독일에서 가장 개방적인 도시이다.
  
   샬레마뉴가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받아 쓴 것은 그 뒤 중요한 선례로 남았다. 즉, 교황이 황제를 임면(任免)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 그리고 독일의 왕만이 황제를 칭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된 것이다. 이런 관례가 그 뒤 신성로마제국(여러 독일의 국가들을 모은 연방국가) 황제로 이어졌다.
  
   샬레마뉴는 文盲者(문맹자)였으나 교육을 중시했다. 그는 영국에서 학자를 초빙하여 궁정학교에서 가르치도록 배려했다. 그는 또 점령지에서 교회를 많이 짓도록 후원했다. 그는 814년에 죽었다. 재위 46년간이었다. 샬레마뉴의 아들은 '경건한 루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의 통합을 유지하기는커녕 세 아들에게 왕국을 쪼개서 나눠주는 일에 전념했다. 그의 死後 왕국은 독일, 프랑스, 北이탈리아 지역으로 쪼개져 세 아들 사이에 분배되었다. 세 아들은 지도력이 약해 지방의 귀족들이 소왕국을 만들면서 서유럽은 다시 분열과 혼돈 속으로 들어갔다.
  
   이때를 틈타, 동쪽에서는 몽골-투르크계통의 유목기마민족인 마자르족(지금의 헝가리 사람들)이 서유럽으로 쳐들어오고, 북쪽으로부터는 배를 잘 타는 바이킹이 쳐내려왔다.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데 이어 이탈리아 남부에 상륙했다. 西유럽의 기독교 문명국가는 다시 위기에 빠져들었다. 이 살육과 파괴의 혼란 속에서 유럽을 구한 것은 기독교였다.
  
   우수한 기병으로써 이탈리아, 프랑스까지 쳐들어오던 마자르족은 점차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왕과 왕자가 세례를 받았다. 드디어 왕자가 1000년 크리스마스 날에 교황이 보낸 왕관을 쓰고 스티픈 1세라 칭하게 되었다. 기독교로 개종한 마자르족은 그 240년 뒤 형제관계인 몽골의 기마군단이 쳐들어오자 기독교 문명 편에 서서 이들한테 저항하다가 나라가 초토화되었다.
  
   바이킹들도 유럽 곳곳에서 정착하면서 기독교를 수용했다. 프랑스, 러시아, 아일랜드에는 바이킹의 정착지가 생겼다. 노르만디, 키에프, 노보그라드 같은 도시에서 바이킹은 정부형태의 관리조직을 만들었다.
  
   바이킹, 마자르, 이슬람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유럽 주민들은 지방의 귀족이나 군벌로부터 보호를 받으려 했고, 여기서 영주들이 등장하고 중세 봉건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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