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대학 생활하러 서울로 출발하겠습니다 浩然의生覺  |  2024-07-27  |  조회 : 61  |  찬성 : 0  |  반대 : 0

당시 기차는 KTX도 없었고 무궁화와 비둘기가 있습니다.

 

객실 창문은 아래위로 여닫게 되었고 창문 밑 재떨이엔 담배꽁초가 항상 가득했고 실내는 담배 연기로 자욱 하지만 누구 하나 담배를 피워도 끄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홍익회라는 열차 구내를 오가며 판매하는 직원이 복잡한 통로를 다니며 판매를 합니다. 주로 사이다 김밥 삶은 계란 소주 오징어 들을 판매 합니다.

대전역을 지날 땐 한 2분 정도 정차하는 데 잠깐 내려 먹는 가끼 우동맛이 일미입니다.

 

그 유명한 노래도 있듯이 대전발 020분에 출발하는 우동의 맛이 늦은 밤 열차라 특히 좋았습니다. 대전역 플랫폼에 잠시 내려서 먹다가 열차가 떠나면 그릇채로 가지고 기차 안에서 먹고 가기도 했지요.

 

서울역에 내려 시계탑을 지나면 공중전화 부스가 즐비합니다. 군복 입은 군인 시골에서 막 직장을 구하려 상경한 듯한 여인들, 자식 집에 다니러 온 아주머니들이 줄 지어있고 사람들은 얼마나 담배를 많이 피우는지. 그 시절엔 그래도 예의는 차렸지요.

 

어떤 넘이 앞에 와서는 말할 땐 죄송하지만담배 한 대만 빌려주세요. 성냥불 좀 빌려주세요’. 꼭 죄송하다는 말은 빼먹지 않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같은데 내일 당장 갚을 듯이 빌려달라고 한다. 시골 어른들에게 담배 빌려 달라다가 야단 맞는 넘들도 많았다. 당시 시계가 귀해서 길 가는 사람에게 이번에는 죄송 합니다가 아닌 실례지만 몇 십니까?’ 담뱃불 빌릴 땐 죄송합니다시간 물을 땐 실례지만하면서 꼭 예의를 갖추고 물었다.

 

나는 노량진으로 가야 한다.

 

첫 생활은 아버지의 사촌 형 집에 가야 한다. 나는 아저씨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냥 큰아버지, 큰어머니로 불렀다. 아버지와 나는 귀가 얇아서 남의 말을 잘 듣는다.

 

큰아버지는 아버지께 당시 마포 정릉 다니는 소형 노선번호 815의 주주가 되라고 했고, 당시 버스 한 대 값이 상당했을 텐데도 그것을 드리고 대신 나를 집에 데리고 있겠다 해서 갔는데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어 6개월 있다가 그 집을 나왔다.

 

1970년대 하숙비 독방은 15만원이었고, 한 학기 등록금은 7만원이다. 하숙집 주인은 아시아 변리사 협회 부회장이셨던 양재관씨 댁이었고, 사모님은 제주도 출신 부 여사란 분이셨다. 생활을 위하여 하숙을 시작한 게 아니고 일본식 집이고 집이 크고 적적해서 시작한 일이셨다. 언덕 위에 있어서 전망도 좋았다.

 

주인 내외분들이 얼마나 좋은 분이셨든지 자기 아들 대하듯이 하셨고, 우리도 두 분께 폐가 되지 않을까 조심 하면서 생활했다. 두 딸이 있었는데 동생 정숙이는 우리를 오빠 라며 따르고 장난도 많이 했다. 나중엔 내심 아주머니께서 우리들 중 누구라도 정숙이와 연을 맺기를 바라셨는데 그냥 세월이 지나 유야무야 되었다.

 

거기서 지낸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 부 회장님께서는 우리에게 변리사 자격시험 볼 걸 권하셨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때 변리사가 어떤 건지 잘 몰랐던 때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지금 보니 참 좋은 직업이라 생각이 든다. 그때 응시했으면 면접이라도 좀 잘 나왔지 않았을까 그냥 추측해 본다. 지금 막내 동서가 변리사고 그 딸은 변리사에다가 변호사다.

 

또 그 집에 일본교포로 있는 부여사의 조카는 이름이 고지로(高次郎)로 우리보다 3살 많은 형이었다. 재일교포라 우리나라 말도 서툴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격의 사람이지만 마술, 요술, 운동 등 다방면에 뛰어나서 우리가 그 형을 많이 따랐다.

 

손재주도 좋았고 아이디어가 좋아 사업을 하기로 했다.

 

사무실은 종로1가 서울빌딩 708호를 임대했다. 사무실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니는 기분이 좋았다. 각자 명함을 새기고 관계자들을 만나 설명했더니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당시 유흥업소마다 손님에게 홍보용 선전물을 주는데 아주 적합하단다. 성냥갑 위에 업소를 홍보하여 납품하는 건데, 그때 성냥갑이란 일반 시중에 있는 손으로 켜는 것이 아닌 군인들이 전쟁에서 사용하는 당겨서 불을 켜는 것으로, 간편하고 부피도 납작해 그 위에 인쇄하기도 좋고, 보기도 좋았다. 한 번에 당겨서 불이 붙는다고 하여 회사 이름을 원풀(one full) 산업이라 지었다.

 

무교동에 있던 극장식 대형 월드컵 식당으로 이주일이 경영하던 초원의 집, 쎄시봉 등 아주 굵직한 곳에서도 주문이 많았고, 사업도 잘되어 공장을 수색에 두고 을지로 인쇄소 거리를 왔다 갔다 했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납품은 많이 하는데 수금이 문제였다.

 

그때 물장사들의 곤조다.

 

수금이 골치 아팠다. 한 번 두 번씩 미루다 보니 한두 곳도 아니고 사업 자금이 고갈되어 결국에는 문을 닫고 말았다. 우리가 유훙업소의 생리를 너무 몰랐다. 수금은 안 되지, 친구들을 불러 그 업소들에 가서 먹는 것으로 제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댓글달기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로그인
  • 글쓴이
  • 비밀번호
  •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