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 예민해진 한 북한인권운동가와 대화
리소라님 얘기가 나 - 마음이 편치 않네요.
년로하신 어머님도 매주 조총련 앞에 가셔 일인 시위하는 그 정성 참 대단!
그 정신을 잊는 따님이 계셔 행복한 가정입니다.
한편 외국 일본에서 식당도 하면서 북 인권운동하시느라 참 힘드시죠.
저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원하는 바에 세상은 꼭 반대로 가는데 너무 답답 -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전단을 중지 -
운명의 탈북은 남한삐라보고 결심,
말을 맘대로 할 수 있는 남한에 가서 북한으로 전단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북한에서부터 햇지요.
그런데 남한정부가 저절로 안 보낸다니 기가막히죠.
그렇다고 개인이 힘은 없고 하여 교계에 열심히 다니며 호소 -
하지만 실망만 -
천만의 교인 중에 또 내가 처음 다닌 여의도순복음교회 70만 중에 함께할 동지가 있었으면 하였지만 단 한명도 없어 보여 낙담했지요.
세상직인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나 수원시험장에서
월급 수백만원 주겠다며 여러번 오라고 하는 것을 마다하고 무보수와 같은 통일인권운동을 하는데 이렇게 외롭고 쓸쓸 -
왜 들 이러냐고 하면 비판이 되어 더욱 외로워지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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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끝에 세상직으로 떠나려 하느님께 최후 통첩!
어카랍니까?하니 - 너! 북한을 잘 아니! - 이에 넘 반가워 -
그럼요! 북한에서 살았으니까요. 하니까 그래요.
그럼 잘 아니 네가 하려마! 이 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 아니! 가장 낮은 탈북자인 내가 뭐 있습네까. 연고가 있어요. 재력이 있어요! 하고 더 길길이 뛰니 -
하느님이 그래요 - 너 그래서 못해! -
이 말에 뻔찌 맞고 케오되어 나름 회개하며 시작했지요.
북한을 잘아니 네가 하라니 - 그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미친듯이 3년간 연구하여 대북풍선을 개발하여 날리기 시작 -
그러자 옛날에는 찾아다니며 하자고 해야 하는데 이제는 세상이 찾아오더구만요.
그래서 민간인으로서 탈북자로서 주체를 가지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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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련은 현재 또 막막할 정도로 찾아왔습니다. 그래도 이겨나가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