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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광주 518 이중건  |  2026-05-18  |  조회 : 71  |  찬성 : 0  |  반대 : 0


1980년 5월은 남포농업대학 연구소 연구원(조수)으로 있을 때이다. 5월에는 농번기로 현지시험포인 평남도 온천군 6.3농장에 있었다. 한해전인 1979년 백설희 기름골 과학자를 숨은 영웅으로 김일성이 내세우며 이를 따라배우라는 열풍이 불때이다.

우리도 과학자 일행으로서 시험포 논에서 밤을 새우며 연구했다. 너무 피곤하여 숙소도 못 들어가고 논판시험포 맨땅에 누워 밤을 새울때도 있었다. 이때 누워 밤하늘 별들을 보면서 당시 방송에서 떠들석한 남조선의 518광주소식을 상기하군하였다. <남조선사람들 참 대단하다! 우리는 저렇게 싸울수 있을까?!>.

항간에서는 여러소문이 떠돌았다. 광주시민들이 공화국에 도와줄 것을 호소하면 개입할 수 있다. 광주시위는 공화국 특수부대의 소행이다.
마침 대학교환수처녀는 남포대남연락소 소장의 딸이었다. 애리애리하고 말쑥한 처녀였는데 내가 시험포에서 지쳐 능막염으로 앓아 입원하자 보통인들은 보기힘든 고급 과자 사탕을 가지고 병 문안 한 적 있다. 당국에서 하도 숨은영웅따라배우기 운동 즉 백설희 과학자를 내세우는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다. 처녀로서 총각 과학자에 대한 연민이 병문안으로 이어진 것이다. 내가 22살 때이다.

1980년 518광주사건 꼭 10년후 탈북하였다. 남한에와서 10년 쯤 살았는데 난데없이 내가 518때 인민군특수부대원(광수)라한다. 유명한 군사전문가 지만원 박사가 광주시민들속 사진을 근거로 제시한다. 나뿐만 아니라 언론에 나온 거의 모든 탈북인사들이 특수군이었다고 사진들을 제시한다. 황장엽도 포함되어 있고 심지어 당시 3살밖에 안되는 김정아 탈북녀도 포함되어있다.

혼란이 가중되자 하태경 국회의원이 주동이 되어 소송이 제기됐다. 그 제일 증인자로 내가 선정되었다. 518당시 북한 남포농대에서 쓴 생활총화기록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판장에서 지만원 피고인과 대질심문이 있었는데 그분은 눈뜨고도 거짓말한다. 문제는 지만원 지지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재판석 대부분이 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대부분은 교회 다니는 분들이다. 하나님이 지 박사를 지켜주실 거라고 기도를 한다. 사실을 증거로 말한 나에게는 일제히 레이저 눈총을 쏜다. 세상 요지경이다.

마무리하면서 - 과연 북한국민은 광주시민들처럼 시위할 수 있는 까. 결과적으로는 어렵다. 남한국민들도 북한처럼 폐쇄하고 억압하면 절대 안된다. 북한국민에게 훈시할 게 못된다는 것이다. 남한은 박정희 독재가 어쩌고 해도 세계와 무역할 만큼 열린 사회이다. 보이지 않는 손을 허용한 경제 제도에서 보이지 않는 자유의지도 발현된 것이다.

왜 국군이 국민을 가혹하게 때리느냐? 이게 군중심리를 일으켜 518시위가 일어났다. 조갑제 기자의 현장취재기사를 보면 공수부대의 가혹한 폭력에 분노한 군중심리가 발단이다. 북한특수군은 고사하고 조직적인 그 어떤 세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구호에는 김일성은 오판말라!였다. 남한은 이만큼 국민이 자유의지를 분출할 만큼 열린사회였다는 반증이다.

북한도 남한처럼 열린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변화는 일어난다. 부디 반정부조직이 아니라도 말이다. 열린사회의 국민의식이 있으면 시위도 조직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통치자는 절대 열린사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대북정책은 열린사회로 만드는 것이 제일이다. 그게 대북정보유입이다. 이를 거꾸로 하는 현 정부의 기대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개 나라를 공공연히 주장하는 김정은 정권에 맞장구를 치는 것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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