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8.20)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 제목이 있었다《예순여덟에도 배워야 할 것이 있다...다치지 않고 나를 지키며 사는 법》
예순여덟이라. 경상도 사람은 쉰, 예순, 일흔. 여든 등을 잘 모른다 알아도 빨리 말하지 못한다 지금도 예순이 몇살인지 몰라서 쉰, 예순. 일흔을 손가락으로 꼽아 보고서야 60살이다는 것을 알았다
젊어서 어떤 공무원연수원에 새마을교육을 갔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 ‘번호’를 하는데 앞사람이 ‘마흔 아홉’ 했고, 그 다음 사람이 ‘오십’ 했다 그러자 모두가 와 웃었다 그러나 나는 왜 웃는지 몰랐다 경상도에서는 마흔 아홉 다음은 의당 오십이기 때문이다
그가 겸연쩍었든지 “경상도는 그 말을 안 쓰니....” 라 말했다 그로부터 반백 년이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쉰. 예순, 일흔, 여든이라고 말하면 그 수효를 빨리 인식하지 못한다 외워 놓아도 쓰지를 않으니 금방 잊어버린다
어떻든 위에서처럼 저렇게 68살을 논하는 분이 몇 살일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살펴보니 예순남은 살 돼 보인다 60대가 68살까지 배워야 한다고 말한 것에 어째 좀 거북한 느낌이 든다 한갓 60대가 대중 앞에서 ‘배움’이 어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지혜롭지 않은 일이다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지만 60살에서 여남은 살도 더 많지 않으면서 저렇게 '나이' 말을 하는 것도 거시기하지 않겠나? 졸수(卒壽)나 백수(白壽), 백수잔년(白首殘年)은 되어야 비로소 68살을 논할 수 있지 않을까. 선병자의라 했다 (선병자의 先病者醫; 먼저 앓은 사람이 뒤에 앓는 이를 훈수할 수 있음)
“나이가 갑절 이상 많으면 아버지처럼 섬긴다 십년이 많으면 형처럼 섬긴다 나이가 5살이 많으면 길을 갈 때 어깨를 나란히 하되 조금 뒤에서 따른다
(年長以倍則父事之 十年以長則兄事之 五年以長則肩隨之)《예기(禮記)》《소학(小學)》《격몽요결(擊蒙要訣)》60살이나 68살이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사이인데 가르치려 들거나 나이를 논하면 ...
몇 해 전에 어떤 승려가 팔부대중을 향해 한 말씀했다 고승이 그랬으니 신문에도 났었다 그가 좌중을 내려다 보면서, 가정생활은 이렇게 하고, 자식은 저렇게 키우라고 말했다 그 기사를 읽고 씩 웃었다 가정생활을 해보지 않았고 자식도 키운 적이 없는 중이, 가정사로 시달리는 세상의 부모들에게 어찌 감히 저런 말을 다 하나 싶어서였다 마찬가지로 고작 60대가 ‘배움'이나 '나이'에 관한 말씀을 하면 특히 더 그렇다